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 1634

어느 밤

어느 밤 임 현 숙 긴 하품은 꿈길로 가자 하는데 아래층 티브이는 쿵쿵 큰북을 쳐대고 벽 너머에선 음표들이 웅얼웅얼 자동차마저 괴성을 지르며 지나가니 마그마가 목덜미를 타고 오른다 화산 폭발 일 분 전 진공청소기로 저 부랑아들을 싸악 흡입하고 싶다 밤은 열심히 새벽으로 달려가고 빈 위장이 해맑게 칭얼거리는 아 화산재 날리는 밤. -림(20210810)

시클라멘 화분과 나

시클라멘 화분과 나 임 현 숙 창가에 놓인 시클라멘 화분 봄볕 소나기에 목이 말랐는지 하얀 꽃 이파리 가로누웠네요 시원하게 물 샤워를 시키니 흰 꽃나비 날아갈 듯 날개를 펼쳐요 시들어가며 얼마나 애타게 나를 바라보았을까요 주인님, 타들어 가는 제 모습이 안 보이시나요 나도 하늘이 기르는 무명초여요 한 때 갈망에 몸부림쳐도 응답이 없을 적 가만히 바라만 보는 줄 알았었지요 가까스로 물을 찾아 일어서며 깨달았어요 숨 넘어가는 고비에서도 나의 주인은 바로 해갈해 주지 않고 스스로 우물을 찾도록 지혜롭게 하셨어요 시클라멘과 달리 나는 내 주인의 형상으로 지어졌잖아요. -림(20210401)

새싹처럼

새싹처럼 임 현 숙 피검사 받는 날 코비드가 건물 밖으로 내몰아 꽃샘잎샘에 바르르 떨며 한 시간여 벌서는 중 매몰찬 바람에 얼굴을 떨구니 새파랗게 손 내미는 이파리 이파리 분화구 같은 땅거죽에 봄 옷을 입히려는 푸른 물레질 점심 후에 다시 시작한다는 안내에 짜증이 솟구쳐 돌아가려는데 발목을 부여잡는 여리디 여린 손가락 '세상살이가 어렵지? 파릇파릇한 날 보렴 기다림은 가혹했지만, 이렇게 피어나잖니' 아무렴 나는 이름 석 자로 불리어지는 사람이잖아. -림(20210304)

입춘이라네

입춘이라네 임 현 숙 저기 배나무 마지막 잎새는 여태 지난여름 빛인데 아이고나 입춘이란다 맹랑한 코비드 해일에도 세월은 씩씩하게 제 할 일하네 나이 탓일까 아니 시절 탓일까 이 적막한 밤 그만 꿈길을 잃었네 어려서처럼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천 마리를 세며 이불과 씨름하다 설핏 꿈길에 접어드는데 처지는 눈꺼풀과 어깨를 얄밉게 툭 치는 먼동의 붉은 손바닥 제 아무리 코비드 파고가 높아도 진달래 개나리 산야를 수놓을 텐데 다시 만난 봄날 큰 하품 진군 나팔처럼 불며 일어나야 하겠네 언 땅 열고 피어나는 복수초처럼 몇 겁을 살아도 죽지 않는 세월처럼 도도히 오늘 또 오늘 매일이 입춘이라네. -림(20210203)

아름다운 친구여, 안녕

아름다운 친구여, 안녕 임 현 숙 배꽃 한 송이 어젯밤 모진 병마에 지고 말았다 폐암이라며 수술도 할 수 없어 대체의학으로 치료한다더니 망할 코로나 핑계로 일 년을 무심히 지내 잘 가라는 인사도 못 하고 떠나보냈네 새해인사를 카톡으로 보냈는데 읽기만 하고 답이 없길래 그런가 보다 싶었지 미련스러워라 그렇게 그렇게 요단강 가를 헤매리라곤 생각을 못했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어둠의 터널에서 불 밝혀주던 따스하고 아름다운 너 고통의 옷 훌훌 벗고 가벼이 잘 가시게 비 잦은 밴쿠버 1월 하늘은 저리도 시퍼런데 널 보내는 이 맘엔 겨울비가 내리네 이담에 흰옷 입은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환히 웃던 네 모습 잊지 않을게 아름다운 배꽃 한 송이 친구여 부디 안녕히. -림(20210119)/친구, 윤희를 하늘로 먼저 ..

저어기 눈발 나리는 소리에

저어기 눈발 나리는 소리에 임 현 숙 해 넘어간 지 오래 머얼리 눈발 나리는 소리 그 발자국인 듯 설레어 그리움의 깃발 치어들면 한 때 붉디붉었던 내 순정은 갈기갈기 낡은 깃발 가까이 가지도 다가 오지도 아니하는 이 아련함이여 추억은 늘 등 뒤에서 부르지 저어기 눈발 나리는 소리 해 넘어간 지 오래 건 만 파릇이 출렁이는 낡은 깃발. -림(20210112)

새해를 맞으며

새해를 맞으며 임 현 숙 묵은 달력을 내려놓습니다 내 마음처럼 무게가 천근이어요 장마다 빼곡한 사연들을 되새겨보니 복덩어리가 수북합니다 가진 게 없다고 빈손이라고 하늘에 떼쓰던 두 손이 부끄러워집니다 가붓한 새 달력을 그 자리에 둡니다 내 마음도 새 달력 같습니다 오늘 또 오늘 쌓일 복 더미 생각에 손등에 푸른 핏줄이 더 불거집니다. -림(20201223)

섬에서 섬을 그리다

섬에서 섬을 그리다 임 현 숙 물보라 하얗게 꽃 수놓으며 뱃길이 다다른 섬 고요가 푸르게 물들어 오월의 보드란 햇살과 찰랑찰랑 눈빛만 부벼댈뿐 섬사람들도 섬처럼 조용조용 웃는다 일상의 먼지를 깔깔 털어내어도 지긋이 그늘을 드리워주며 지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시간 회포를 채 못 풀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아리게 그려보는 가고 싶은 섬 낯선 섬에도 길이 있어 지나는 이와도 눈빛을 마주하건만 맞바라기 동백섬은 닿을 수 없어 바람 편에 종이학만 접어 보낸다. -림(20160518)/갈리아노 섬에서

고향 그리워

고향 그리워 임 현 숙 한여름 구슬땀을 말리던 바람 들과 산에 구절초 수를 놓으면 뭉게구름 한가로이 재를 넘고 구절초 향기 따라 국화꽃이 피었지 노란 꽃, 자주 꽃 무슨 사연 그리 많아 저리도록 서럽게 피었을까 꼭 다문 꽃 입술이 방그레 웃는 날에도 오도 가도 못하는 내 그리움은 먼 산 바라보며 노래만 부르네. 2012.11.13 림

詩가 되어

詩가 되어 임 현 숙 부서져내리는 햇살에 눈이 부셔 7월의 파란 하늘도 볼 수가 없고 술렁술렁한 세상에 귀가 막혀 새들의 속삭임도 들리지 않지만 꽃불에도 호르르 타 버릴 듯 버석거리는 가슴은 아름다운 詩語에 촉촉이 젖어 들꽃 향기 넘치는 언덕이 된다 좋은 시를 읽으면 詩의 한 소절이 되어 너에게 읽히고 싶다 아니 詩가 되어 네 안에 살고 싶다. 2012.07.18 림

푸른 계절엔 더욱 그리워

푸른 계절엔 더욱 그리워 임 현 숙 산이 푸른 옷 입으면 마을엔 꽃 바람 일렁이네 여우들 가슴팍 보일락 말락 늑대들 이사이로 엉큼한 꽃 바람 들락날락 칭칭 동이고 장 보러 온 나는 몇 가지 사 들고 줄행랑이네 발코니에 나와 앉으면 개구리 우는 수풀에 고라니 한 쌍 머물다 가고 마을 휘돌아온 꽃 바람 내 가슴 흔들다 가네. -림

창의 크기만 한 세상

창의 크기만 한 세상 임 현 숙 매일 내다보는 창밖 풍경은 네모난 틀 안에 갇혀있어 좁은 공간 안에 높낮이가 있고 드넓은 하늘도 창틀만 하다 구름을 몰고 가던 바람 벽 속으로 꼬리를 감추고 달려오던 차들도 벽이 꿀꺽했다 지나쳐간 풍경을 뒤쫓아 눈을 돌려보지만 그림 한 점 만이 동그마니 걸려있을 뿐 내일은 사면에 커다란 창을 내야겠다. -림(20120522)

봄이 기우는 창가

봄이 기우는 창가 임 현 숙 푸르게 다가와 젖은 가슴 하늘에 띄워 놓고 야속이 돌아서는 봄을 불러세우고 싶습니다 겨울잠 자던 산하를 깨우고 게으른 발길을 재촉하더니 내 조그만 창문에 갇혀 연두 바람 머무는 풍경화가 되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빌던 소원도 봄꽃 따라 져버렸지만 봄이 기우는 창가에는 그리움이 방그레 피었습니다. -림(20130519)

추억의 그림자

추억의 그림자 임 현 숙 칼바람에 마음이 베여도 어금니 물어 아픔 삼키고 말 없는 바위보다 바람 소리 들려 좋은 추억 속 그림자 사람아 비 내리는 날이면 김 서린 유리창에 쓰고 지우던 보고 싶다는 말, 흔적이 사라질까 아쉬워 유리창을 닦지도 못하는 돌아보면 더 그리운 사람아 네가 탄 기차가 떠나버린 간이역에서 다음 기차를 기다리기엔 밤이 너무 깊었다. -림(2012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