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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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회한

어떤 회한 임현숙  도망간 잠을 쫓아가다 지치면젊은 날 휘두른 칼날의 회한이 삼류 무대의 막을 올린다 '베르디의 나부코'가 흘러나오는 찻집한 여자가 속눈썹이 긴 남자를 돌아서고 있다그녀의 부족함이 그의 가난을 받아줄 수 없는 건 아니라는데해사한 미소에 얹힌 코털 때문이었을까커피가 식기도 전에 일어서는 모질은 여자다음날 갱지에 써 보낸 몇 줄의 무덤덤한 문장으로순정을 베고 만다 그을음을 남기고 꺼져버린 촛불지워도 지워내도 스미인 칼 빛 오래도록 행복을 빌었던당돌한 청춘의 흔적 머리에 억새꽃 한창인 이제그만 잊어도 되지 않겠니 물안개 속에서 먼동이 불새처럼 날아오른다정갈한 햇살에 머리를 감아야겠다. -림(20250115) https://www.youtube.com/watch?v=92hmjW1-NJI

설날 밥상

설날 밥상 임현숙   코리아의 명절 설날밴쿠버 우리 밥상에 만국기 휘날리며젓가락이 세계 여행을 한다 차이나에 도착해 차오몐 한 입오사카로 날아가 튀김 한 점 이탈리아에선 손녀만 피자 한 조각내 고향 코리아의갈비찜과 산적그리고 떡국 한 입두루두루 다니다 가도내 젓가락 단골은 김치 맛집 우리 집 밥상은설날에도 냠냠 세계 일주 떡국 한 사발에나이 한 살 더 먹던어머니 밥상 그립다.  -림(20250128) https://www.youtube.com/watch?v=tserjeGZaVY&t=5s

첫눈

첫눈  임현숙  첫눈 내린 이른 아침소복소복 숫눈에  내 것이라고 발 도장 꾸욱 찍습니다 눈보라 펄펄내게로 와무조건 내 편이라며함박꽃 한 아름 안겨줍니다 저 아랫마을 길 하늘로 이어놓고내 비틀린 발자국 싹싹 지우고마음밭 메말라 피지 않던 시꽃구름 빛 하늘에 몽글몽글 피어나며내 여린 눈동자에외로운 가슴팍에하얗게 흐드러집니다 첫사랑 같이 다가와  봄 햇살처럼 피어나는 눈꽃허물 덮는 내 편 있어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오늘입니다.  -림(20250202)   https://www.youtube.com/watch?v=Y7nI6h2z0Ns

내 신실한 종

내 신실한 종 임현숙    발톱을 깎다가 가뭄 든 밭을 보았다손바닥보다 더 주름진 발바닥가장 낮은 곳에 엎드려어둡고 시리고 끈적한 날들을 무병하게 지나오며발효된 서사(敍事)가 밭고랑에 꿈틀거린다딱딱한 바닥과 말랑말랑한 뒤꿈치의아슬아슬한 첫 입맞춤부터달과 해의 무게를 버텨내며 다져진 군살이이따금 티눈으로 샐쭉할 때면 발이 투덜거리곤 했다잘 나가는 신작로만 맞댄 건 아니었으나시궁창에 얼굴 비비지 않은 걸 고마워할까담배 연기 같은 허무를 탐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길까구수한 맛 미끄럼 치는 주방 바닥흙냄새 정다운 오솔길과의 만남이소소한 행복이었음을 기억할까지금도 까슬한 바닥 위에 맨살로 납작 엎드려명령을 기다리는 내 신실한 종내일은 태양과의 맞선을 주선해야겠다.   -림(20250113) https://www..

등잔/도종환

등잔 / 도종환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심지만 뽑아 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그을음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 하랴욕심으로 나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방 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넉넉하기 때문이다넘치면 나를 태우고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욕심부리지 않으면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 권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설날 풍경 한 점

설날 풍경 한 점 임현숙  그 해 설날 오후보란 듯이 차린 상을 물리고 나면진초록 들판에 열두 달이 엎치락뒤치락다섯 마리 새가 날고 폭탄이 터졌다사돈간에 화투패 들고 앉아 허허허남의 설사를 좋다고 긁어가고피박, 광박 징한 용어들을 뱉어가며 눈치 싸움을 즐겼다 격도 체면도 뱀 허물처럼 벗어버린사돈끼리의 우애로운 자리였는데이국땅에서 그들 없는 설날을 만나니상 차리느라 해쓱하던 시간이 보물처럼 비쳐온다 잔소리쟁이 작은 언니 막내 요리는 눈도 즐겁다던 큰오빠 그림처럼 앉아 받기만 하던 손위 시누이도 기억 속에서 고대로인데 언젠가 다시 만날 명절에는 하나둘 먼 길 떠나  빈자리엔 귀에 익은 목소리만 희미하겠다  명치에 박제된 그날의 군상 돌아가고 싶은 우리 자리.  -림(20250122) https://www.y..

부앙부앙 울었다

부앙부앙 울었다 임현숙               부앙 울리는 저음의 색소폰 소리칠순의 멋쟁이 오빠는황혼의 회한을 불어대고 있었다힘겨운 날숨은 지난날의 보람이요꺼지지 않은 불꽃의 여생인 것을아우들이 알아주길 바랐을까삐걱대는 음에 키득거리던 못난 아우들을발그레 웃으며 바라보던큰 오라버니는다시 들을 수 없는 울림을 남기고은하 별이 되었다내 어릴 적에 예쁜 막내라고친구 모임에 손잡고 다니셨는데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도 못 해부앙부앙 울었다.  -림(20111128)   https://www.youtube.com/watch?v=dZrT2o9TfOQ

내 안에 우는 돌이 있다/문정희

내 안에 우는 돌이 있다 문정희  내 안에 우는 돌이 있다절벽에서 절벽으로 뛰어다니는소나기가 있다 휴대전화를 꺼내어 찍고 싶은데눈 뜨면 안 보이는울부짖음이다 점토의 빛깔로 다가오는 저녁내 안에 우는 돌에다 물을 준다돌의 키는 자라무엇이 될 수 있을까허공에서 허공으로 뛰어다니는새가 될 수 있을까 내 안에 우는 돌이 있다 휴대전화를 꺼내어 찍고 싶은데싱싱한 비명은 찍을 수 없다         — 시집 『그 끝은 몰라도 돼』 2025.1

그런 날에는

그런 날에는 임 현 숙  개미 발소리가 들리는 날*까똑 소리가 기다려지는 날딸의 귀가를 재촉하는 날잘 정리된 서랍을 다시 뒤적이는 날그런 날엔 애꿎은 추억을 벌씌운다 *까똑까똑 말 거는 것이 귀찮은 날말벗이 되어주는 딸아이가 성가신 날넋 놓고 있고 싶은 날그런 날엔 내게 타이른다산다는 건 낡은 추억을 깁는 게 아니라싱싱한 추억거리를 짓는 거라고.  -림(20210609)*카카오톡 알림 소리  https://www.youtube.com/watch?v=jUgmEOcxsB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