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 1624

가을 기도

가을 기도 임 현 숙 수수하던 이파리 저마다 진한 화장을 하는 이 계절에 나도 한 잎 단풍이 되고 싶다 앙가슴 묵은 체증 삐뚤거리던 발자국 세 치 혀의 오만한 수다 질기고 구린 것들을 붉게 타는 단풍 숲에 태우고 싶다 그리하여 찬란한 옷을 훌훌 벗고 겸손해진 겨울 숲처럼 고요히 고요히 사색에 들어 입은 재갈을 물고 토하는 목소리에 귀담아 오롯이 겸허해지고 싶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아 부름에 선뜻 대답할 수 있기를 겨울이 묵묵히 봄을 준비해 봄이 싱그럽게 재잘거리는 것처럼 나도 무언가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림(20211022)

그런 날

그런 날 임 현 숙 개미 발소리가 들리는 날 *까똑 소리가 기다려지는 날 딸아이의 귀가를 재촉하는 날 잘 정리된 서랍을 다시 뒤적이는 날 그런 날엔 애꿎은 추억을 벌씌운다 *까똑까똑 말 거는 것이 귀찮은 날 말벗이 되어주는 딸아이가 성가신 날 넋 놓고 있고 싶은 날 그런 날엔 내게 타이른다 산다는 건 낡은 추억을 깁는 게 아니라 싱싱한 추억거리를 짓는 거라고. -림(20210609) *카카오톡 알림 소리

여섯 개의 눈

여섯 개의 눈 임 현 숙 다초점 안경 여섯 개의 눈으로 위로는 멀리 아래론 가까이 숨기고 싶은 주름살 잡티 어제보다 선명하다 뭉뚱그려 보이던 깨알 설명서도 가갸 거겨 확실히 책 속에서 '너'라고 읽은 글자는 '나' '네 탓'이라고 보던 글자는 '내 탓' 눈이 밝아 마음도 맑다 한결 맑아지려 유리 눈을 닦으면 앙큼한 발상이 은근슬쩍 철옹성 네 심상을 들여다보려 눈동자 너머로 까치발 한다. -림(20210526)

봄비 오시네

봄비 오시네 임 현 숙 봄비 오시네 사납게 파고들던 겨울비 저만치 보드라이 흐르는 봄비의 손결 회색빛 마을 화사해지리 다정한 빗살에 파랗게 일어서는 풀 내음 거칠었던 숨 다스리며 나도 한껏 푸르러지리 봄비는 저물녘 마음 강가 도란도란 흐르는 너의 목소리 겨울 그림자 길어진 날엔 새파란 봄비여 어서 오소서. -림(20210506)

'열린문학회'에서

'열린문학회'에서 임 현 숙 빗방울 소리 배경 음악으로 시인은 마음의 노래를 부르고 수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쏟아붓는 비처럼 서정의 단비 내리는 이날 추운 사람도 고픈 사람도 그저 좋아라 덩실거린다 빨강 파랑 노랑 서로 다른 빛깔의 우리지만 이 시간만큼은 초록물이 흠뻑 들었다 좋은 글을 읽고 듣노라면 초록 초록 마음이 자라난다. -림(20210927) *한국문협 밴쿠버지부의 '제6회 열린문학회'가 비 오는 날 공원에서 열렸다.

어느 밤

어느 밤 임 현 숙 긴 하품은 꿈길로 가자 하는데 아래층 티브이는 쿵쿵 큰북을 쳐대고 벽 너머에선 음표들이 웅얼웅얼 자동차마저 괴성을 지르며 지나가니 마그마가 목덜미를 타고 오른다 화산 폭발 일 분 전 진공청소기로 저 부랑아들을 싸악 흡입하고 싶다 밤은 열심히 새벽으로 달려가고 빈 위장이 해맑게 칭얼거리는 아 화산재 날리는 밤. -림(20210810)

시클라멘 화분과 나

시클라멘 화분과 나 임 현 숙 창가에 놓인 시클라멘 화분 봄볕 소나기에 목이 말랐는지 하얀 꽃 이파리 가로누웠네요 시원하게 물 샤워를 시키니 흰 꽃나비 날아갈 듯 날개를 펼쳐요 시들어가며 얼마나 애타게 나를 바라보았을까요 주인님, 타들어 가는 제 모습이 안 보이시나요 나도 하늘이 기르는 무명초여요 한 때 갈망에 몸부림쳐도 응답이 없을 적 가만히 바라만 보는 줄 알았었지요 가까스로 물을 찾아 일어서며 깨달았어요 숨 넘어가는 고비에서도 나의 주인은 바로 해갈해 주지 않고 스스로 우물을 찾도록 지혜롭게 하셨어요 시클라멘과 달리 나는 내 주인의 형상으로 지어졌잖아요. -림(20210401)

새싹처럼

새싹처럼 임 현 숙 피검사 받는 날 코비드가 건물 밖으로 내몰아 꽃샘잎샘에 바르르 떨며 한 시간여 벌서는 중 매몰찬 바람에 얼굴을 떨구니 새파랗게 손 내미는 이파리 이파리 분화구 같은 땅거죽에 봄 옷을 입히려는 푸른 물레질 점심 후에 다시 시작한다는 안내에 짜증이 솟구쳐 돌아가려는데 발목을 부여잡는 여리디 여린 손가락 '세상살이가 어렵지? 파릇파릇한 날 보렴 기다림은 가혹했지만, 이렇게 피어나잖니' 아무렴 나는 이름 석 자로 불리어지는 사람이잖아. -림(20210304)

입춘이라네

입춘이라네 임 현 숙 저기 배나무 마지막 잎새는 여태 지난여름 빛인데 아이고나 입춘이란다 맹랑한 코비드 해일에도 세월은 씩씩하게 제 할 일하네 나이 탓일까 아니 시절 탓일까 이 적막한 밤 그만 꿈길을 잃었네 어려서처럼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천 마리를 세며 이불과 씨름하다 설핏 꿈길에 접어드는데 처지는 눈꺼풀과 어깨를 얄밉게 툭 치는 먼동의 붉은 손바닥 제 아무리 코비드 파고가 높아도 진달래 개나리 산야를 수놓을 텐데 다시 만난 봄날 큰 하품 진군 나팔처럼 불며 일어나야 하겠네 언 땅 열고 피어나는 복수초처럼 몇 겁을 살아도 죽지 않는 세월처럼 도도히 오늘 또 오늘 매일이 입춘이라네. -림(20210203)

아름다운 친구여, 안녕

아름다운 친구여, 안녕 임 현 숙 배꽃 한 송이 어젯밤 모진 병마에 지고 말았다 폐암이라며 수술도 할 수 없어 대체의학으로 치료한다더니 망할 코로나 핑계로 일 년을 무심히 지내 잘 가라는 인사도 못 하고 떠나보냈네 새해인사를 카톡으로 보냈는데 읽기만 하고 답이 없길래 그런가 보다 싶었지 미련스러워라 그렇게 그렇게 요단강 가를 헤매리라곤 생각을 못했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어둠의 터널에서 불 밝혀주던 따스하고 아름다운 너 고통의 옷 훌훌 벗고 가벼이 잘 가시게 비 잦은 밴쿠버 1월 하늘은 저리도 시퍼런데 널 보내는 이 맘엔 겨울비가 내리네 이담에 흰옷 입은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환히 웃던 네 모습 잊지 않을게 아름다운 배꽃 한 송이 친구여 부디 안녕히. -림(20210119)/친구, 윤희를 하늘로 먼저 ..

저어기 눈발 나리는 소리에

저어기 눈발 나리는 소리에 임 현 숙 해 넘어간 지 오래 머얼리 눈발 나리는 소리 그 발자국인 듯 설레어 그리움의 깃발 치어들면 한 때 붉디붉었던 내 순정은 갈기갈기 낡은 깃발 가까이 가지도 다가 오지도 아니하는 이 아련함이여 추억은 늘 등 뒤에서 부르지 저어기 눈발 나리는 소리 해 넘어간 지 오래 건 만 파릇이 출렁이는 낡은 깃발. -림(20210112)

새해를 맞으며

새해를 맞으며 임 현 숙 묵은 달력을 내려놓습니다 내 마음처럼 무게가 천근이어요 장마다 빼곡한 사연들을 되새겨보니 복덩어리가 수북합니다 가진 게 없다고 빈손이라고 하늘에 떼쓰던 두 손이 부끄러워집니다 가붓한 새 달력을 그 자리에 둡니다 내 마음도 새 달력 같습니다 오늘 또 오늘 쌓일 복 더미 생각에 손등에 푸른 핏줄이 더 불거집니다. -림(20201223)

섬에서 섬을 그리다

섬에서 섬을 그리다 임 현 숙 물보라 하얗게 꽃 수놓으며 뱃길이 다다른 섬 고요가 푸르게 물들어 오월의 보드란 햇살과 찰랑찰랑 눈빛만 부벼댈뿐 섬사람들도 섬처럼 조용조용 웃는다 일상의 먼지를 깔깔 털어내어도 지긋이 그늘을 드리워주며 지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시간 회포를 채 못 풀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아리게 그려보는 가고 싶은 섬 낯선 섬에도 길이 있어 지나는 이와도 눈빛을 마주하건만 맞바라기 동백섬은 닿을 수 없어 바람 편에 종이학만 접어 보낸다. -림(20160518)/갈리아노 섬에서

고향 그리워

고향 그리워 임 현 숙 한여름 구슬땀을 말리던 바람 들과 산에 구절초 수를 놓으면 뭉게구름 한가로이 재를 넘고 구절초 향기 따라 국화꽃이 피었지 노란 꽃, 자주 꽃 무슨 사연 그리 많아 저리도록 서럽게 피었을까 꼭 다문 꽃 입술이 방그레 웃는 날에도 오도 가도 못하는 내 그리움은 먼 산 바라보며 노래만 부르네. 2012.11.13 림

詩가 되어

詩가 되어 임 현 숙 부서져내리는 햇살에 눈이 부셔 7월의 파란 하늘도 볼 수가 없고 술렁술렁한 세상에 귀가 막혀 새들의 속삭임도 들리지 않지만 꽃불에도 호르르 타 버릴 듯 버석거리는 가슴은 아름다운 詩語에 촉촉이 젖어 들꽃 향기 넘치는 언덕이 된다 좋은 시를 읽으면 詩의 한 소절이 되어 너에게 읽히고 싶다 아니 詩가 되어 네 안에 살고 싶다. 2012.07.18 림

푸른 계절엔 더욱 그리워

푸른 계절엔 더욱 그리워 임 현 숙 산이 푸른 옷 입으면 마을엔 꽃 바람 일렁이네 여우들 가슴팍 보일락 말락 늑대들 이사이로 엉큼한 꽃 바람 들락날락 칭칭 동이고 장 보러 온 나는 몇 가지 사 들고 줄행랑이네 발코니에 나와 앉으면 개구리 우는 수풀에 고라니 한 쌍 머물다 가고 마을 휘돌아온 꽃 바람 내 가슴 흔들다 가네.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