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추억의 서랍에서 27

냄비를 닦으며

냄비를 닦으며 임현숙 냄비의 찌꺼기를 닦는다 손등이 도드라지도록 문지르니 반들반들 은빛 화색이 돈다 내 생각의 부스러기도 냄비처럼 닦고 싶다 책을 펴들어 현인의 지혜로 쓸어내고 복음으로 베어 보지만 칼칼한 게 개운하지 않다 가을이 무르익은 시집을 연다 '묵은 벽지가 바람처럼 들판을 간다' 한 절의 시구가 까칠한 화장기를 벗겨 낸다 향이 깊은 시는 마음을 닦는 비누이다 나도 누군가 누군가의 마음을 닦아 주는 시가 되고 싶다. -림(20140821)

섬에서 섬을 그리다

섬에서 섬을 그리다 임 현 숙 물보라 하얗게 꽃 수놓으며 뱃길이 다다른 섬 고요가 푸르게 물들어 오월의 보드란 햇살과 찰랑찰랑 눈빛만 부벼댈뿐 섬사람들도 섬처럼 조용조용 웃는다 일상의 먼지를 깔깔 털어내어도 지긋이 그늘을 드리워주며 지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시간 회포를 채 못 풀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아리게 그려보는 가고 싶은 섬 낯선 섬에도 길이 있어 지나는 이와도 눈빛을 마주하건만 맞바라기 동백섬은 닿을 수 없어 바람 편에 종이학만 접어 보낸다. -림(20160518)/갈리아노 섬에서

고향 그리워

고향 그리워 임 현 숙 한여름 구슬땀을 말리던 바람 들과 산에 구절초 수를 놓으면 뭉게구름 한가로이 재를 넘고 구절초 향기 따라 국화꽃이 피었지 노란 꽃, 자주 꽃 무슨 사연 그리 많아 저리도록 서럽게 피었을까 꼭 다문 꽃 입술이 방그레 웃는 날에도 오도 가도 못하는 내 그리움은 먼 산 바라보며 노래만 부르네. 2012.11.13 림

詩가 되어

詩가 되어 임 현 숙 부서져내리는 햇살에 눈이 부셔 7월의 파란 하늘도 볼 수가 없고 술렁술렁한 세상에 귀가 막혀 새들의 속삭임도 들리지 않지만 꽃불에도 호르르 타 버릴 듯 버석거리는 가슴은 아름다운 詩語에 촉촉이 젖어 들꽃 향기 넘치는 언덕이 된다 좋은 시를 읽으면 詩의 한 소절이 되어 너에게 읽히고 싶다 아니 詩가 되어 네 안에 살고 싶다. 2012.07.18 림

푸른 계절엔 더욱 그리워

푸른 계절엔 더욱 그리워 임 현 숙 산이 푸른 옷 입으면 마을엔 꽃 바람 일렁이네 여우들 가슴팍 보일락 말락 늑대들 이사이로 엉큼한 꽃 바람 들락날락 칭칭 동이고 장 보러 온 나는 몇 가지 사 들고 줄행랑이네 발코니에 나와 앉으면 개구리 우는 수풀에 고라니 한 쌍 머물다 가고 마을 휘돌아온 꽃 바람 내 가슴 흔들다 가네. -림

창의 크기만 한 세상

창의 크기만 한 세상 임 현 숙 매일 내다보는 창밖 풍경은 네모난 틀 안에 갇혀있어 좁은 공간 안에 높낮이가 있고 드넓은 하늘도 창틀만 하다 구름을 몰고 가던 바람 벽 속으로 꼬리를 감추고 달려오던 차들도 벽이 꿀꺽했다 지나쳐간 풍경을 뒤쫓아 눈을 돌려보지만 그림 한 점 만이 동그마니 걸려있을 뿐 내일은 사면에 커다란 창을 내야겠다. -림(20120522)

봄이 기우는 창가

봄이 기우는 창가 임 현 숙 푸르게 다가와 젖은 가슴 하늘에 띄워 놓고 야속이 돌아서는 봄을 불러세우고 싶습니다 겨울잠 자던 산하를 깨우고 게으른 발길을 재촉하더니 내 조그만 창문에 갇혀 연두 바람 머무는 풍경화가 되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빌던 소원도 봄꽃 따라 져버렸지만 봄이 기우는 창가에는 그리움이 방그레 피었습니다. -림(20130519)

추억의 그림자

추억의 그림자 임 현 숙 칼바람에 마음이 베여도 어금니 물어 아픔 삼키고 말 없는 바위보다 바람 소리 들려 좋은 추억 속 그림자 사람아 비 내리는 날이면 김 서린 유리창에 쓰고 지우던 보고 싶다는 말, 흔적이 사라질까 아쉬워 유리창을 닦지도 못하는 돌아보면 더 그리운 사람아 네가 탄 기차가 떠나버린 간이역에서 다음 기차를 기다리기엔 밤이 너무 깊었다. -림(2012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