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꿈 헛꿈 임 현 숙 치과 진료대에서 입술 너머 부끄러움이 낱낱이 드러난다 찢고 부수며 음미하던 욕망의 맷돌 상앗빛 청춘은 아스러지고 하얀 박꽃 미소도 침침해진 걸 엑스레이가 속속 파헤치고 있다 치아도 피부처럼 세월 따라 늙는다며 보수 공사를 요구한다 우두둑 씹으면 와르르할 예..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9.07.06
단추를 달며 단추를 달며 임 현 숙 사위의 양복 단추를 달며 돋보기를 꺼내 쓰니 바늘귀에 실을 꿰어달라면 짜증 내던 며느리 늑골 사이가 짜르르하다 가신 지 오래 숨결 묻어나는 것 전혀 없어도 불쑥불쑥 빙의하는 어머니 불혹에 홀로 백일 된 아들 고이며 부엉부엉 지새우는 밤 한숨 타래로 바느질..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9.03.27
난 아닐 줄 알았는데 난 아닐 줄 알았는데 임 현 숙 백발의 시어머니 바늘귀를 내밀면 퉁명스럽게 실을 꿰어드렸네 난 안 그럴 줄 알았는지 얼굴에 검은 꽃 얼룩지고 툭하면 삐지고 묵은지 같은 이야기 골백번 풀어놓았네 난 아닐 줄 알았는데 난 정말 안 그럴 줄 알았나 보네 상속 거부할 수 없는 세월의 유산..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8.06.10
봄은 봄은 임 현 숙 이 동네 저 동네 꽃 잔치 굽은 풀잎 허리 펴고 개울물은 좋아라 웅얼웅얼 먹구름은 하얀 명주 날개 살랑 봄 , 봄, 봄 신나는 봄이란다 딸, 아들, 강아지까지도 싱숭생숭 가정에 봄바람 불어 저녁 식탁 등이 늦게 켜지고 설거지하던 고무장갑 창밖 꽃가지 따라 출렁 흔들리는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8.04.12
삶이여, 그대 삶이여, 그대 임 현 숙 삶이여 그대로 인해 불효자 되고 누명도 쓰고 수모에 이 악물어도 얼간이라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입니다 수려한 꽃의 꽃받침처럼 사철 그늘진 자리에서 언젠가 벚꽃으로 피어날 기적을 꿈꾸며 저~어기 높은 하늘로 손 흔들어 보기도 하지만 묵묵부답일 뿐 기다..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8.03.30
머리를 자르며 머리를 자르며 임 현 숙 뒤통수 살리고 길이는 짧게 주문하는 대로 가위가 지나가면 화들짝 일어서는 흰머리 세월의 무게로 늘어진 눈꼬리 탄력 없는 볼이며 메마른 입술 거울 속 얼굴이 참 낯설다 하양 교복 카라 명랑한 입술 검은 머리 소녀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을 어푸거리며 하구까..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8.03.06
우리 우리 임 현 숙 처음엔 그랬다 당신으로 행복합니다 마음까지도 내 것인 양 착각마저도 마음의 빗장은 쉬이 열린다는 걸 왜 몰랐을까 가슴앓이와 무덤덤한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흘러 귀밑머리 치어다 보며 드는 깊은 사념 퇴화한 날개 파닥파닥 훠 얼 훨 날고 싶어요 생각이 부딪힐 때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8.01.10
안녕,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여 안녕,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여 임 현 숙 풍랑 일던 한 해야 잘 가거라 널 맞던 첫날 그려보던 바람은 인제도 미완성이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따스한 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부실한 몸이나마 앓아눕지 않고 보고 듣고 느끼며 좋은 사람들과 일 할 수 있었으니 무엇을 더 탐하겠느냐 세상에..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7.12.29
이순耳順에 들다 이순耳順에 들다 임 현 숙 어엿이 내 나이 이순 트로트보다 발라드가 좋고 연인들을 보면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거울 속 모습은 할머니 호칭이 어색하지 않다 이순에 들어서니 무심히 버리고 온 것들이 어른거린다 하루가 멀다 붙어 다니던 친구 장흥 골 어느 카페 부부동반 교회 모임 형..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7.12.18
야누스 십이월 야누스 십이월 임 현 숙 십이월, 기쁜 성탄이 울려 퍼지고 빨강 초록 물결이 눈부신 저마다 흥겨운 자리 궁핍한 시선 하나 자선냄비에 던져지는 동전처럼 구르는구나 삶의 등짐이 버거워 영혼마저 팔 듯한 가여운 사람, 사람아 부디 힘내시라 고난과 생명의 십자가처럼 두 얼굴의 연말이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7.12.08
봄을 그리며 봄을 그리며 임 현 숙 봄맞이하던 오솔길에 낙엽 쌓이고 쓸쓸한 겨울이 노닐고 있네 계절은 제 자리로 돌아오건만 내 삶은 언제나 겨울 울타리 안 연두 봄 찾아와 문 열어주기를 조금만이라는 바람의 끈 부여잡고 기다리고 또 기다릴밖에. -림(20171202)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7.12.02
가을과 겨울의 사이 저쯤 가을과 겨울의 사이 저쯤 임 현 숙 가을이 그리는 수채화를 보노라면 고즈넉한 풍경 한 점이 애틋합니다 가을이 무르익은 어스름 녘 가로등 그윽이 눈을 뜨고 소슬한 바람 한 자락 갈잎 지는 곳 나처럼 외로운 벤치 하나 쓸쓸함이 황홀한 그 자리에 앉으면 풍경 저편에 사는 추억이 천리..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7.11.18
딸이 엄마가 되는 순간 딸이 엄마가 되는 순간(첫 손주) 임 현 숙 엄마가 되는 길은 지옥의 불꽃 터널을 지나 응애 소리에 함박꽃 피는 것 무통 주사를 맞고 악악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설핏 잠든 딸을 바라보니 내 몸이 그날을 기억하여 몸서리친다 허리가 바서지고 살이 터지는 고통으로 널 낳았는데 주사 한 방..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7.09.08
하늘을 고이고 살라 하지만 하늘을 고이고 살라 하지만 임 현 숙 맑은 바람결에 흐르는 구름이 되는 아침 어제보다 그늘을 더 드리우는 나무 한 그루와 눈을 맞추면 내 말에 옳다 끄덕이기도 아니라고 살래살래 도리질하며 철부지 나를 가르친다 나뭇잎처럼 가벼이 흔들리지 말고 뿌리처럼 지긋하게 땅을 밀고 하늘..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7.05.26
그리운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임 현 숙 다정한 오월이 오면 어머니 그리워 카네이션보다 진한 눈빛으로 허공 저 너머 둘러봅니다 늘 허약하셨던 어머니 풋풋한 시절 비 내리던 날 교문 앞 친구 어머니 보며 철철 젖어 달려갈 때 아주 작은 부러움이 사춘기에 그늘이었지만 친정 나들이 때마다 고이 접은..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7.05.08
모닥불을 지피며 모닥불을 지피며 임 현 숙 새해 벽두부터 감기에 붙잡혔다 콜록거리느라 잠이 저만치 달아나버려 주섬주섬 일어나 앉는다 길도 곤히 잠든 한 밤 불티 날리는 소리처럼 목을 조르는 기침 소리만이 고요를 깨운다 삶이란 게 모닥불 같아서 날마다 솜털 같은 목숨을 불쏘시개로 사르며 활활..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7.01.03
내 입술에 문패 내 입술에 문패 임 현 숙 꽃길을 걸을 땐 고마워~라는 소리 향기로운 노랫말처럼 귓불을 달구었지 자갈길을 달리며 미안합니다... 빈 마음 구겨지는 말 문패처럼 달고 사네 저 모퉁이를 돌면 신작로가 나올까 오늘도 부끄러운 문패 입술에 달고 하늘 한 번 올려다보네. -림(20161125)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6.11.25
낯설지 않은 낯설지 않은 임 현 숙 두드륵 두드륵 낙숫물 소리에 불면의 밤을 포옹해야 하는 가을밤 한여름 햇살이 뜨겁게 뒹굴다 간 자리 주룩 비가 강아지처럼 핥고 있다 단풍은 뚝뚝 지고 빗방울처럼 다정하던 우리 이야기 불티처럼 스러져가며 먼 데 사람은 더 멀어지고 밤은 가까이 더 길어지고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6.10.25
또 한 번의 생일에 또 한 번의 생일에 임현숙 가을 문 앞에서 어머니는 낙엽을 낳으셨지 바스러질까 고이시며 젖이 없어 홍시를 먹이던 어미의 맘 반백이 넘어서야 알았네 소금 반찬에 성근 보리밥 밀 풀 죽도 먹어보았지 또 한 번의 생일에 맛보는 이밥에 기름진 반찬도 엄마 생각에 쌉싸름하네 이제 생일의 의미는 소풍 길의 종착역이 가까워지는 것 영혼의 포장지는 낡아가는데 아직도 마음은 신록의 숲이어서 가을빛 사랑을 꿈꾸기도 하지 내 생에 가장 빛나던 순간 함께하던 모든 것들이 어른거리네 유리창을 쪼갤 듯 쏟아지는 햇살이 환희로 숨 가쁘게 하는 구월 둘째 날 어딘가의 추억 속에 유월의 장미로 살아있다면 가파른 소풍 길이 쓸쓸하진 않겠네.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6.09.02
가장 잔인하고 슬픈 말 가장 잔인하고 슬픈 말 임 현 숙 내 입술 안에서 가장 슬픈 문장이 칼을 갈고 있습니다 언제든 튀어나와 당신 심장을 깊숙이 찌르고 말 것입니다 조금만이라는 시간은 달콤한 고문이어서 입술 앙다물고 버텨왔는데 길고 긴 푸른 기다림은 신기루였습니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 말하고 싶겠..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6.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