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시2·다시 부르는 노래 90

쓸쓸

쓸쓸 임현숙  푸르름이 바래질 무렵이면무 이파리 여름의 기억을 질끈 동여맨 채시골집 처마 밑에서 늙어 갔다  뒷산에 단풍 가랑잎 지고 찬비 내리면허리 굽은 큰 형님시래기를 삶아 국을 끓였다 코를 긁는 구수한 냄새에눈치 없는 뒷집 영자 엄니초저녁별 앞세워 마실 왔다지 가을은 태평양을 건너와텅 빈 들녘 같은 쓸쓸을 질펀하게 풀어 놓고시린 속 달래려고향의 맛 시래깃국 끓이는데 푸름이 하루를 달구던 내 여름날이 우러나며쓸쓸에 쓸쓸을 더하고행여나눈치 없는 누군가 기다려진다 초저녁별빛도 쓸쓸이다.  -림(20240902) https://www.youtube.com/watch?v=92eh9cWz8Hw

모란

모란 임 현 숙  내 마음속 스란치마어찌 알고 자락 자락펴놓았을까 열 길 내 속엔스란치마 끌며 몸종 거느리는공주가 숨어 살지 스란치마 폭에서 졸고 있는저 반반한 햇살 좀 봐 시샘하듯 달려오는바람의 버선 콧날치맛자락 들치고 냉큼 달아나네 공주의 숨비소리개미 병정들 바람을 쫓고졸던 햇살 날아가며여울지는 초록 윤슬 동화가 살아나는 뜨락에황실의 유월이조곤조곤 피고 있네. -림(20240531) https://youtu.be/rA7bjHMoUCA

주름살

주름살 임현숙  말갛게 세안하고 거울 앞에 앉습니다이맛살 모래톱에 세월이 파랑입니다잔물결 파고마다 들고 나던 이야기삶의 벼랑에서 눈물짓던 날의 기도눅눅한 하늘에 돋아나던 별과의 대화며미움과 용서로 문드러지던 순간들이살모사처럼 빳빳이 고개 듭니다남루하나 진솔했던 생의 일기장을꼼꼼히 손가락 다림질하는데잘라내고 싶은 가시들이 헛기침합니다삶을 한 번만 연습할 수 있다면가시 없는 파랑으로 너울거릴까요 오늘도 모래톱에 파랑은 출렁이고덜 여문 하루가 비릿한 냄새를 풍깁니다부디 부끄러운 이름은 새기지 말자고 앞서가는 머리에 당부합니다. -림(20240817)  https://www.youtube.com/watch?v=YFeRDu7B4d4

골목길 가로등

골목길 가로등 임현숙  모두가 퇴근하는 시각 출근한다모자를 푹 눌러쓰고 늘 같은 자리에 서서침침한 눈으로 어둠을 밝히며습관처럼 발소리를 매만진다취업에 고민하는 젊은이의 처진 어깨긴 그림자로 끌어안고곤드레만드레 아저씨 걱정스레 쏘아보며고물 줍는 할머니 굽은 등이 밤하늘보다 더 무거워빈 수레바퀴를 굴리는 눈길딸아이가 돌아올 무렵이면 두 눈 부릅뜨고더욱 열심히 안경알을 닦는다허름한 하루하루 말없이 다독이다 보면이따금 슬퍼져 눈을 껌뻑인다그들이 곤히 잠든 후에도골목을 지키는아버지의 자상한 눈빛이다. -림(20170812) https://www.youtube.com/watch?v=Pg-j66dnc7I

고수머리의 설움

고수머리의 설움 임현숙  그녀 머리카락은 반곱슬에다 울창한 솔숲이었다멋 내기를 알던 날부터얼굴보다 머리 매만지기에 공들였는데세월이 허리 굽고 나서솔숲에 바람길 나고 빗질 한 번이면 다소곳하다그녀 딸이 그녀를 똑 닮아속절없는 유전자 타령에 입이 툴툴댄다'나도 긴 머리 찰랑찰랑하고 싶어요'미안한 마음을 매직 파마로 달래주기도 하지만얼마 안 가 다시 돌아오니  날마다 전기 고문 비명 윙윙거리고화상 입은 곱슬은 더욱 까칠해진다세월을 따라가다 보면 고분고분해지련만 꽃나이에 멋 내고 싶은 설움이머릿결 따라 구불구불 흐른다   그녀는 딸의 솔숲을 쓰다듬으며 웅얼거린다 *알라딘 램프의 지니를 불러내고 있다.  -림(20240716) *알라딘 램프의 지니: 디즈니 영화, '알라딘'의 등장인물로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

갈증

갈증 임현숙   땡볕이 마그마처럼 흘러내려 아름드리 산이 불산이다불길은 마을을 삼키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천재여도 인재여도 가문 여름 탓이다 강물도 흐름이 굼뜬 나날에어컨 바람 속에서한여름을 보내는 시심도 달구비를 기다린다 후두두둑반가운 빗방울 후둑이는 아침노랗게 시름하던 풀잎 생글거리고저 앞 강물도 거푸거푸 빗물을 받아먹는다 여름을 식히는 말발굽 빗살에목타던 푸른 것 게걸스러운데꽃 지고 그루터기만 남은 고목의 시심은불붙지도 젖지도 않는 모래사막 한 사흘 밤낮 들이키면 젖어 들까달아나려는 달구비의굵은 종아리를 부여안는다.  -림(20240729) https://www.youtube.com/watch?v=XsO-iCsvCr8&t=28s

내 유년의 골목길

내 유년의 골목길  임 현 숙     내 유년의 골목길은 놀이터술래잡기 고무줄놀이 까르르 깔깔옷은 꼬질꼬질해도 마음은 아라비아 부자였다어린 발자국 집으로 돌아가면 구뜰한 냄새 가장을 반기고뿌연 외등 깜박이며 연인들 입맞춤 눈 감아 주기도 했다밤 깊어 출출할 무렵 부르잖아도 찾아오는 야식 배달메~밀~~묵 찹~쌀~~떡~~~좁은 골목길은 고릿하지만 정겹고 은근한 멋이 있었다세월이 무심히 흘러 찾아간 그 골목엔유년의 웃음소리 대신 자동차가 거드름 피우고 있고하늘로 향하는 욕망이 빚은 건물 창마다 옛 시절 흐논다허우룩해 멈춰 선 귓가에 메아리치는 풀잎피리 소리   포장도로 저만치서 어린 발소리 달려온다.   -림(20190826)  https://youtu.be/A16zUdbg6UU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임현숙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어린 날골목길이 미어지라 몰려다니며전봇대에 술래 세워소리 높이 외쳐 하던 놀이 술래 몰래 다가가기굼벵이라서 잘 들켰지 어른이 되어선세월과 둘이 놀이하며 늘 들킨다내일은 이기리라 다짐해도내일은 언제나 내일일 뿐 오랫동안 술래인 세월은조롱하듯 히죽거리지만 이번엔 어림없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오늘은 꼭꼭내가 이긴다. -림(20240704)

비구름의 바람

비구름의 바람  임현숙             어제 물을 너무 마셨나 봐내 몸이 하늘만큼 불어났네회칠한 천장 같아 파란 얼굴 다 가렸다고 하늘이 울어이리저리 끌고 다니던 바람도내 발아래서 빙빙 도네 눈물 젖은 꽃 이파리노려보는 그믐달 눈초리로내 몸을 찔러 줄래풍선 로켓 되어 날아갈게 하늘 눈물 그치고파랑 햇살 폭포처럼 쏟아지면난 몽글몽글 양 떼 옷 입고하늘 목장에서 뛰어놀 거야. -림(20240705)

첫_이란

첫_이란  임현숙   첫_사랑 첫_눈 첫_손주 첫_만남 첫_이별  첫_ 그것은 햇귀 같은 숫느낌 꽃등 설렘 떨림이요 아련함이다  눈 감는 날까지 흐노는 붉은 문장이다.  -림(20240702)  *순우리말 시어 풀이 숫_: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손을 대지 않아 본디 그대로 있는’,         또는 ‘손을 타지 않아 깨끗한’의 뜻을 더하는 말 햇귀: 사방으로 뻗친 햇살 꽃등: 맨처음 흐놀다: 누군가(무엇인가)를 굉장히 그리워하며 동경하다

밴쿠버의 여름 텃밭은

밴쿠버의 여름 텃밭은   임현숙  친구네 여름 텃밭에 초록 물이 여물었다  은근한 볕이 빚은 햇술 풋내 마을을 서성거리고솜털 가시 옷 입은 호박잎 울타리는푸성귀 밭의 파수꾼  오가는 눈길 머무는 한낮 정경이 푸짐하다   볕에 그슬린 곱슬이 상추햇술에 만취해 벌러덩 누운 부추큼직한 *슈룹 들고 선 머윗대    그물처럼 엉긴 참나물 수풀엔바람이 걸려 웅웅거리는친구네 풀잎 밥상  외갓집 평상에서 고추 상추쌈 싸 먹던푸름의 여름찰옥수수 냄새 군침 삼키던그날 눈앞에 있다  친구네 여름 텃밭은알싸한 입맛이 농익어 가고두고 온 것들을 불러내는구수한 외할머니 밥상  물밀듯 차오르는풀빛 고향이다.   -림(20240707)  *슈룹: 우산의 순우리말

양은 도시락의 추억

양은 도시락의 추억 임 현 숙   겨울이 오면교실 조개탄 난로 위에노란 도시락 탑이 쌓였지양은 도시락 안에서김치가 볶아지고누룽지 냄새 코를 씰룩였어난로 뒤에 앉은 친구는수업 시간 내내도시락 층 바꾸느라 수업은 건성이고이 교시 끝나는 종 울리기 무섭게속전속결 하는 전투가 벌어졌어김치 콩자반 달걀부침이 단골이었지만먹고 돌아서면 고픈 소녀들에겐황제의 식탁이었지이따금 소시지를 발견하면화살 빗발치듯 젓가락이 노략질했지소시지 주인은 한 조각도 맛 못 보았지선생님 오신다는 신호에입안에 밥 물고 냄새는 나 몰라라시침 뚝 떼었어묵묵히 수업을 시작하는 선생님은아마도 비염을 앓았을 거야.   -림(20150105) https://www.youtube.com/watch?v=Mlz_YpKfwV0&t=3s

라스 베이거스

라스 베이거스   임 현 숙    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라스 베이거스는  금별무리 반짝이는 은하수  그 물결에 부유하러 온 나는 무료한 집고양이  저마다 빛나는 호텔에 들어서면  도박장이 눈을 맞추고  홀린 사람들 곁 지나며  대박 한번 당겨보고 싶어 꼬리가 근질거린다 따가운 햇볕이 호령하는 거리를 개미 떼처럼 밀려가는 사람들 소박한 눈이 호강하는 명품전 내 이름표 달고 싶은 빌딩이 춤추는 거리에 차마 슬픔은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키만 큰 팜 트리가  제 손바닥만 한 그늘을 내어주는 거리를  숨차게 기웃거리다  꼬리 축 처져 호텔 방에 들어서면  묵직한 고요가 안아주는 쓸쓸하지 않은 곳   늙은 집고양이  집 밖에서 지낸 며칠  달러로 작은 행복을 살 수 있었다.   -림(20190528)  htt..

그리움의 등을 켜니

그리움의 등을 켜니 임 현 숙   초록빛 꿈을 그리던젊은 날은지문조차 닳아버린 기억 안갯속을 헤맬 때면책갈피에 길이 있을 것 같아눈동자에 별똥별이 흐를 때까지헤르만 헤세를 탐미하고빨간 줄을 그어가며 외우곤 했다 오롯이 앞만 보고 달릴 땐하늘이 네모난 창문 크기만 했는데그리움의 등을 켜니창문이가 없는 하늘만 하다 두고 온 날들의 이야기나를 스쳐 간 것들이돌아 달려올 때면별똥별 해일이 몰아친다. -림(20130621) https://www.youtube.com/watch?v=KSopc-HDZcE

엄마의 빨랫줄

엄마의 빨랫줄 임 현 숙  그 시절 엄마는아침 설거지 마치고이불 홑청 빨래를 하곤 했다커다란 솥단지에 폭폭 삶아돌판 위에 얹어 놓고탕탕 방망이질을 해댔다고된 시집살이에마음의 얼룩 지워지라고부아난 심정 풀어보려고눈물 대신 그렇게 두드렸을까구정물 맑아진 빨래를마당 이편에서 저편으로말뚝 박은 빨랫줄에 널어놓으면철부지는 그 사이로 신나서 나풀댔다부끄러운 옷까지 대롱대롱 매달린울 엄마 늘어진 빨랫줄은 마음의 쉼터옹이 지고 구겨진 마음이훈풍에 펄럭이고 있었다엄마가 불쑥 그리운 날먼저 가신 하늘에 빨랫줄 매어 놓고엄마의 호박꽃 미소를 널어 본다. -림(20090709)

안개 도로

안개 도로  임 현 숙   온종일 안개가 마을을 먹고 있다 시골집 굴뚝에서 웅성웅성 피어오르던 연기처럼 꾸역꾸역 달려와 지붕을 삼키고 키 큰 나무를 베어 먹더니 지나는 차까지 꿀꺽한다 잿빛 도로가 덜거덕거리며 어깨를 비튼다 문득 사람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등에 업은 삶의 무게가 저 길만 할까 싶다 달리는 쇳덩어리에 고스란히 밟히다가 달빛이 교교한 새벽녘에서야 숨을 돌린다 신과의 싸움에서 진 아틀라스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처럼 거북등 같은 저 길도 돌아눕지 못하는 모진 형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수은등 빛 안개가 아픈 등을 핥으면 워어워엉 슬픈 울림이 안갯속을 걸어 다닌다 길은 붉은 눈물을 떨구고  바라보는 내 등에 날개가 돋는다.  -림(20140117) https:..

바다장(葬礼)

바다장(葬礼)을 바라보며 임현숙  영종대교가 저만치 바라보이는 바다여기라고 손 흔드는 부표파랑 이는 그곳에 이별이 흐른다 언젠간 가야하는 저승길물속에서 태어나 다시 물로 돌아가는  바다장꾹꾹 눌러 우는 울음이 부표를 맴돌고망자는 점점이흐르다 흐르다 파도가 된다 '죽어 누울 방 한 칸을 마련하고 돌아서며세상을 더 사랑하게 될까 봐 울었다'는어느 노시인이 떠올라내 오랜 바람을 일서둘러 저 바다에 묻는다 꽃송이 송이 부표 옆을 흐르며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흔들리는 부표.  -림(20240426)

흐린 봄날의 사색

흐린 봄날의 사색 임 현 숙    밤새 울다 지친 하늘이 시름겨운 낯빛으로 눈 뜨는 아침  찌푸린 구름을 걷고   봄이 오는 산야에푸짐한 햇살을 고루고루 퍼주고 싶다 건넛집 할머니 하회탈 얼굴에 추워 웅크린 꽃망울에 서글픈 마음 벽에 솜털 같은 봄볕을 바르고 싶다 "엄마, 난 괜찮아요."봄빛 닮은 한마디저 하늘로 쏘아 올리고 싶다 여우비 내린다쨍쨍한 햇살로 도배되는 하루는싱그러운 수채화 두루마리.  -림(20240428)

산이 일어선다

산이 일어선다 임현숙 산이 일어선다 투명한 봄햇살에 검푸른 수의를 벗고 있다 푸른 피부가 짓이겨지고 불에 타버려도 죽음을 모르는 불사조 세월 무덤에서 삭정이 털어내며 부활하고 있다 골 따라 흐르는 맑은 피 일어서는 풀향기 꽃향기 아랫마을 숙이는 에취 에취 코앓이 중이지만 마음은 바람 타는 청보리밭이다 산마루 보듬고 있던 하늘도 좋아라 금빛 햇살 펌프질하고 볕에 굶주렸던 겨울 사람 금싸라기 분칠하며 부활의 날개 파드닥거린다 산이 일어선다 산 아래 살아있는 것들이 초록초록하다. -림(20240401) 유투브 업로드 https://www.youtube.com/watch?v=qDcmJFj7Fcg

봄머리에

봄머리에 임 현 숙 잎샘바람 속살에서 봄이 해처럼 솟아오른다 민들레 선한 얼굴로 잔디밭에 발톱을 기르고 겨우내 쓸쓸 주렴 드리운 창가에 정다운 봄볕 놀러 오니 태평양 건너 얼굴 얼굴이 꽃숭어리로 핀다 잘 지내니 언제 볼 수 있을까 살다 보면 만나지겠지 꽃송이마다 팽팽한 말풍선 열리고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풍선 하나하나 터트리며 꽃물 들이는 봄머리 발바닥이 짜 르 르 르 나도 꽃이 되려나 보다. -림(2024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