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빵 치마 멜빵 치마 임 현 숙 무릎 아래 반 뼘 정도 내려오던 체크무늬 멜빵 치마 물려 줄 동생도 없고 쑥쑥 자라는 키 때문에 내 유년의 옷은 늘 무릎 아래 길이었다 똑같은 옷을 입은 친구는 살짝 보이는 허벅지가 앙증맞은데 치렁한 내 치마는 기도하는 수녀처럼 엄숙했다 엄마는 우후죽순 같은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1.30
사랑의 톱니바퀴 사랑의 톱니바퀴 임현숙 얘야, 사랑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내 절반을 비워내고 그이를 끌어안는 거야 나를 내세우기보다 그에게 맞춰가는 거지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서로 맞물려 째깍 째깍 굴러가듯 오목 볼록을 포용하는 거란다 서로 불룩한 욕심을 채우려..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1.23
참말로 수상하다 참말로 수상하다 임 현 숙 온 동네가 수상하다 며칠째 하얀 안개 커튼을 드리운 채 경찰차 사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잠복근무 중인 게 틀림 없다 움직이는 빨간 안개등이 수군수군 누군가와 연락하는 중 내 마음의 은밀한 사생활을 꼭꼭 숨겨야겠다. -림(20130121)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1.21
어서 구름이 걷히면 좋겠어요 어서 구름이 걷히면 좋겠어요 임 현 숙 저 하늘 영근 꿈을 따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내리막길이란 말인가요 쉰 고개까지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왔지요 신데렐라는 꿈도 꾸지 않았어요 때로 숨이 차 계단에 앉아 남은 층계를 세어보기도 하고 행복할 땐 그 자리에 멈추고도 싶었지요 저기..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1.17
내 사랑의 유효기간 내 사랑의 유효기간 임 현 숙 거름망에 똬리를 튼 머리카락 한 줌이 문득 고맙습니다 몇십 년을 거품으로 박박 비비고 수건으로 와락 와락 주물러도 낙엽 지듯 떨어진 자리에 솔가지같은 새순이 다시 숲을 이루니 내 삶의 유효기간 동안 머리카락은 끊임없이 내 생각을 먹고 나뭇잎처럼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1.15
서리 서리(霜) 임 현 숙 밤새 앓던 아버지의 잿빛 신음이 아침 마당에 내려앉아 하염없이 눈물지었습니다 느즈막이 얻은 막내딸 결혼식도 못 보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넋이 시린 꽃으로 피었습니다 첫 월급으로 사드린 털모자로 백발을 감추듯 자신의 무능력도 깊이 묻고 싶으셨을 내 늙으신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1.11
겨울 밤안개 겨울 밤안개 임 현 숙 공습경보도 없이 안개가 겨울밤을 습격하자 도시는 비명도 못 지르고 백기를 듭니다 동장군 바람조차 침묵하는 밤 불 켜진 창문마다 창틈을 꼭꼭 여미지만 최면에 걸린 듯 안갯속에 빠져듭니다 밤이 깊을수록 소리 없이 노략질하는 안개를 창을 통해 내다보다 하얀..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1.03
그날의 당신이 그립습니다 그날의 당신이 그립습니다 임 현 숙 흰 꽃잎 날리듯 눈이 내리면 그리운 사람이 더욱 그립다 추워서 발그레한 귓불이 앵두처럼 예쁘다며 따고 싶다 속삭이던 당신 심장 천둥소리 들킬까 봐 한 걸음 물러섰지만 그날부터 내 마음은 당신의 포로였지요 해일처럼 밀려와 눈멀게 하던 콩깍지..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1.03
슬픈 홍시 슬픈 홍시 임 현 숙 서리가 내리기 전 떫은 감을 따서 항아리에 재우면 조청처럼 달곰한 홍시가 시어머니 입맛을 다시게 했다. 긴 겨울밤, 오물오물 홍시를 드시며 옛날 얘기하듯 들려주시던 이야기는 슬픈 모정의 역사이다. 한국동란 발발 무렵, 시아버지가 마을 청년당원에게 끌려가 죽..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2.28
눈이 내리면 좋겠어 눈이 내리면 좋겠어 임 현 숙 아침에 눈을 뜨면 온 세상 하얗게 눈이 쌓였으면 좋겠어 아무도 몰래 소복소복 눈길에 그대라는 발자국 찍어 겨우내 발목에 묶어둘 거야 몇 날 며칠 펑펑 쏟아져 세상이 눈 속에 갇히면 시름을 묻어놓고 당신과 나 눈사람 부부 되고 싶어. -림(20121203)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2.03
아픔 아픔 임 현 숙 고지서 함에 줄지어 선 고지서들 뽀얀 살결 보드라 한 데 마음은 냉정하구나 하루하루 다가오며 날 쏘아보는 숫자들 잔뜩 독이 오른 것부터 줄 세워 보지만 서로 먼저라 아우성이고 통장은 묵비권 행사 중. -림(20121130)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1.30
미련 미련 임 현 숙 깊숙한 어둠 속에서 겨울옷을 끄집어낸다 여름은 더 깊이 갇혔고 아직 철삿줄에 대롱거리는 가을 한 번도 외출을 못한 채 겨울에 밀려나는 가을이 슬프게 바라본다 오랜 기악 속의 네 눈빛처럼. -림(2012)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1.29
낙엽의 노래 낙엽의 노래 임 현 숙 한껏 햇살을 품에 안았어 푸른 산을 노을빛으로 물들이고 자작나무 숲에 노란 나비 나풀거렸지 새벽녘 안개에 촉촉이 젖어들면 단풍 숲은 무릉도원이었어 아직 뒷산엔 꽃불이 일렁이고 강나루 길엔 막 불꽃이 피는데 부르지도 않은 가랑비가 자박자박 오더니 자꾸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1.21
11월에 내리는 비 11월에 내리는 비 임 현 숙 숨겨진 가을의 이야기가 쏟아진다 수다스러운 뺑덕어미처럼 후드득후드득 알아들을 수 없는 줄거리가 자동차 지붕 위에서 침을 튀긴다 단풍나무에 은행이 열렸대 글쎄 은행나무에 불이 붙었다네 지칠 줄 모르는 입담으로 너와 나의 그리움이 뒤엉켜 가을의 전..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1.19
이런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이런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임 현 숙 힘이 들 때 격려의 말 한마디는 희망입니다 슬플 때 손잡아 주는 마음은 기쁨입니다 하는 일에 함께하는 마음은 사랑입니다 작은 것을 나눌 줄 아는 마음은 보람입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희생입니다 이런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1.15
말의 가시 말의 가시 임 현 숙 고슴도치 가슴에 가시가 없는 건 새끼를 품에 안을 때 아플까 봐 그런 거래 살갗에 박힌 가시야 뽑아내면 아물지만 얘야 울컥 쏘아댄 말의 가시는 쏟아진 물과 같단다 두고두고 생각날 거야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구나. -림(20121111)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1.11
가을아 안녕 가을아 안녕 임 현 숙 해거름 코스모스가 강변에서도 골목 어귀에서도 감탄사를 보내오며 가을이 왔지요 물빛 높은 하늘 뜨겁게 타오르던 단풍 기분좋게 살랑이던 바람까지 붉은 가을은 크고 작은 느낌표로 그리움에 떨게 하더니 아직도 못다 한 노래 풍경 속에 머무는데 동글동글 마침..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1.06
이 가을 외롭지 않은 영혼 있으랴 이 가을 외롭지 않은 영혼 있으랴 임 현 숙 이 가을 외롭지 않은 영혼 있으랴 밤벌레 울음에 귀 기울여지는 밤 몽유병처럼 앙상한 날개 퍼덕이며 내 어머니의 나라로 머나먼 여행을 하곤 한다 외진 곳에 어머니를 묻던 날 내 생에 슬픔과 불행도 봉인했지만 외로움은 어쩌지 못했나 보다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0.27
당신의 집에 묵어가도 될까요 당신의 집에 묵어가도 될까요 임 현 숙 가을, 당신의 집에 묵어가도 될까요 마당쇠 바람이 선들선들하니 살갑고요 국화향 가득한 정원도 아름다워요 사랑채 앞 감나무가 휘어질 듯 주먹 감이 열리고 커다란 곳간엔 거미줄도 황금빛인 풍요로운 당신 집에서 무전취식을 한들 폐가 되진 않..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10.03
낙엽이 지는 것은 낙엽이 지는 것은 임 현 숙 무한한 시간에 잠깐 다녀가는 인생 욕심도 미련도 가지지 말아야지 서 있던 자리에서 밀려나는 느낌은 장대비 속에 홀로 선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르면 여름이 가을에 자리를 내어주듯 자연스레 물러남이 현명한 거야 푸르던 시절 돌아보니 아득한 옛일이요 곳..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2.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