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자 겨울 여자 임 현 숙 사알짝 푼수인 그녀는 구불구불한 인생길을 가며 봄의 길목에선 눈웃음치는 진달래꽃으로 여름을 나는 울타리에선 선홍빛 장미로 꽃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났지요 간절한 사랑꽃 마지막 장미로 피고 이제 까치밥처럼 마른 씨만 남은 겨울에 삽니다 빈 마음 밭에 피는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4.02.05
질투 질투 임 현 숙 사랑 앞에 우아하던 그녀가 오물통에 빠졌다 생각은 저만치 앞서 가 있는 걸 태연한 척했을 뿐 의심이 부글부글 끓어 마음이 푸르딩딩 독이 올랐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고 집착이 아니라고 믿음이라고 거짓을 앞세워 미소 짓더니 질투가 눈꼬리에 날을 세웠다 질투는 도..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4.02.04
내리막길은 내리막길은 임 현 숙 오르막과 내리막이 나란히 달리는 길섶 삼층집 천정이 경사진 방에서 반백의 소녀가 봄을 가꾼다 높은 창 너머로 밤하늘과 소곤거리며 꿈을 그리다가 찾기만 할 수 있는 생명 통장에서 하루를 꺼내는 아침이 뻐근하다 행복 찾아 오십여 계단을 어렵사리 오르고 나니..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4.01.22
안개 도로 안개 도로 임 현 숙 온종일 안개가 마을을 먹고 있다 시골집 굴뚝에서 웅성웅성 피어오르던 연기처럼 꾸역꾸역 달려와 지붕을 삼키고 키 큰 나무를 베어 먹더니 지나는 차까지 꿀꺽한다 잿빛 도로가 덜거덕거리며 어깨를 비튼다 문득 사람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등에 업..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4.01.17
그리움만 쌓입니다 그리움만 쌓입니다 임 현 숙 눈이 내립니다 한 장의 풍경 엽서 위에 삐뚤빼뚤 지나온 발자국 하얗게 지우며 닳아빠진 발바닥 잘 디디라 고개 숙이게 합니다 하얀 편지가 날립니다 온 세상 지극히 사연으로 덮여도 내게 온 편지 한 장 찾다가 찾다가 밤이 오면 싸락싸락 그리움만 가슴에 쌓입니다. -림(20131209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12.09
12월의 기도 12월의 기도 임 현 숙 손끝에 가시가 돋고 발목이 가늘어지도록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가슴에 멍울 진 열하나의 옹이에 이제 마지막 옹이 박히고 있습니다 새봄이 오면 옹이마다 새싹 움트고 우윳빛 가시꽃 피고 앙상한 발목엔 물이 오를까요 잎 푸르던 여름을 기억합니다 큰 그늘 드리우던 그 날을. -림(20131205)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12.05
그땐 몰랐어요 그땐 몰랐어요 임 현 숙 늦은 나이에 낳은 막내딸 키만 커다란 전봇대에 시집 보내 놓고 날마다 전화기 앞에 앉아 기다리셨지요 곰살궂지도 않은 딸이 뭐 그리 예쁘다고 친정 나들이 가던 날은 힘없는 다리 이끌고 부엌을 지키며 따뜻한 밥상 차려 내셨어요 신랑이랑 아가랑 시어머니랑 알콩달콩 행복 짓느라 친정엄마는 마음 밖에 있다가 울음이 터지는 날에 그리워하곤 했지요 골목 어귀에 서성거리며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다리던 그 마음을 그땐 몰랐어요 그리워하며 보고 싶은 마음 사랑, 사랑은 늘 기다림인 것을. -림(20131123)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11.23
소식 소식 임 현 숙 먼 길 떠나지 않아도 집을 나서면 손짓하는 고운 빛에 잠자던 붉은 피 쿵쿵 뛰어노는데 다홍 감이 여물어갈수록 감잎 지는 소리 뚝뚝 가을은 저물어 가고 바알갛게 까치밥 지어놓고 반가운 까치 소리 기다리며 들릴 듯 말듯 행여 오늘일까 그리운 고향 하늘 바라봅니다 심술스런 가을비에 눈물짓는 마지막 이파리가 기다리는 내 마음같습니다. -림(20131110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11.10
꿈의 계절 꿈의 계절 임 현 숙 가을을 만나러 온 숲 빈 벤치에 앉으면 누군가 먼저 와 서성인 흔적 마음 둘 자리 찾아 머언 하늘바라기 하다 고독이라는 낙엽이 되었을까 바람 소리 들리지 않아도 가을은 한 잎 두 잎 고운 빛 시어(詩語) 나풀나풀 장시(長詩)를 짓고 꿈결처럼 곁에 와 앉는 임 그림자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10.22
시인 詩人 임현숙 어느 시월 아침 가을이라는 독주를 마신다 깊고 푸른 하늘빛이 그리워 한 잔 핏빛 단풍잎이 부러워 한 잔 추적추적 가을비가 서러워 또 한 잔 마셔도 마셔도 무너지지 않는 이성 하여, 슬픈 시인이라는 이름이여! -림(20131008)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10.08
가을비 가을비 임 현 숙 버스의 엔진음이 팀파니를 치는 음악회 빗방울은 건반을 두드리고 발걸음들이 현을 켠다 불협화음에 추락한 붉은 단풍잎의 어깨가 들썩이고 천둥소리 전율하는데 빗속을 걷는 내 마음도 아득히 먼 곳으로 구슬픈 가락을 불고 있다.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10.06
연서 戀書 임현숙 갈잎 비처럼 내리는 날에는 노란 은행잎을 닮은 한 통의 편지가 그립습니다 추억의 서랍에서 잠자던 편지를 깨워봅니다 달달한 속삭임이 허기를 달래주고 해 묵은 장처럼 감칠맛 나는 구절구절이 무거운 하루에 날개를 달아줍니다 오늘은 나도 누군가의 외로움을 물..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10.02
10월의 서시 10월의 서시 임 현 숙 앙상한 겨울 숲에선 침묵을 배웠고 연둣빛 너울대는 숲에선 희망을 품었다 이제 나뭇잎이 푸르른 수줍음에서 깨어나 짙은 화장을 하는 가을이다 바알갛게 타는 숲에서 십 년 체증을 불태우라고 시월의 숲이 날 부른다 저녁엔 절망이란 가시에 찔리고 아침이 오면 희..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10.01
가을엔 마음의 창을 열어요 가을엔 마음의 창을 열어요 임 현 숙 총총 걸어가는 사람이여 푸른 하늘이 손짓하는 가을엔 마음의 창을 열어요 낮에는 햇살이 놀러 와 불을 지피고 밤이면 별빛 내린 창가 갈잎 소곤대는 이 가을 행복하다 행복하다 마법의 주문을 걸지 않아도 노란 나뭇잎 손잡고 빠알간 단풍 만나러 가..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9.27
가을아 옛이야기 같아라 가을아 옛이야기 같아라 임 현 숙 가을인가 봐 그토록 뜨겁던 바람이 그믐달의 싸늘한 눈매를 닮았어 가로수 잎이 뱅그르르 바람개비 되었네 가을이 오면 여름이 떠나가듯이 꿈의 내일이 오면 시련의 오늘이 지나간다지 황금 가을이 내게 올 때 제비처럼 박씨 하나 물고 온다면 금 나와..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8.28
가을의 기도 가을의 기도 임 현 숙 그리운 건 다 흘러간 구름 같다고 그 여름 뜨겁던 기억은 귀뚜리 자장가에 잠들어도 머언 하늘가 늦여름 밤을 배회하는 달빛이 하 서러워 상념에 젖어 뒤척입니다 뒤란 감나무에 푸른 감이 주렁주렁 익어가는데 벙글어지지 못한 나목은 울긋불긋 물드는 세상에 남..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8.19
비처럼 내게 오시렵니까 비처럼 내게 오시렵니까 임 현 숙 비는 늘 곧게 내립니다 바람결에 기울어지긴 해도 때로 천천히 때론 급하게 굽이진 고갯길도 숨차면 쉬어가도 구부러지잖고 달려옵니다 하늘 은총처럼 휘지 않는 절개 있어 나는 비가 좋아요 그대도 머나먼 길 비처럼 내게 오시렵니까. -림(20130816)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8.16
산다는 건 산다는 건 임 현 숙 산다는 건 주어진 멍에를 메고 먼 길을 가는 것 저어기 어떤 이는 멋진 차를 타고 어떤 이는 편안한 신발 신고 꽃길 달려가는 여행길이지만 여기 어떤 이는 맨발로 부르트고 피 흘리며 고행의 가시밭길 헤쳐가는 것 걷다가 걷다가 큰비를 만나면 젖은 솜 지고 가는 당..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7.18
아줌마는 아줌마는 임 현 숙 아줌마는 용사 바퀴벌레도 보는 즉시 떡메를 치지요 아줌마는 외과 의사 팔딱거리는 고등어 배도 썩썩 거침없이 도려내지요 아줌마는 슈퍼맨 집안일에 팔뚝이 굵어지고 뱃살도 두둑하지만 밥, 빨래, 청소, 육아... 운전기사까지 면허증이 수두룩하지요 아줌마는 궂은..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7.13
유월 유월 임 현 숙 유월은 설익은 연애 첫 만남은 어색하고 서툴지만 자꾸 윙크하는 새콤새콤 풋사과 맛 흥청거리는 햇살 타고 하늘을 나는 마냥 부푼 풍선 여행 초록 풍경들이 달려와 머물고 싶은 간이역 아직은 신비로운 우리 사이. -림(20130605)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3.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