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있어요- 홍성란 애인 있어요- 홍성란 노래자랑에 입상하신 여든한 살 할머니가 분홍셔츠에 흰 바지 차려입고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다소곳 환히 부르네 숨은 턱에 찼으나 손 모아 파르르 입술 모아 애인 있어요, 말 못한 애인 있다니 여든넷 어머니 그늘 겹쳐오네 새치 뽑던 파마머리 젖가슴 뭉클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9.30
앗싸, 죽은 여자 / 황봉학 앗싸, 죽은 여자 / 황봉학 나의 지갑 속에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죽어 있다. 어떤 때는 죽은 남자를 팔아 산 여자를 사기도 하는데 앗싸노래방에서 도우미를 신청하고 죽은 남자를 내밀면 아주 효험이 있다. 운이 좋으면 쭉쭉빵빵인 아가씨를 사기도 하고 막 요염이 덧칠해진 30대 여인을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9.25
단풍드는 날-도종환 단풍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09.18
사라진 손바닥-나희덕 사라진 손바닥-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9.16
아비가 오다/광토 김인선 아비가 오다 炚土 김인선 아마 생전의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해가 지기 전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이들 부지런히 오라하고 서둘러 아침부터 미리 제상을 정성껏 차려야 할 것이다. 북어의 주둥이와 꼬리를 자르자 부스스 하얀 가루가 한 움큼 방바닥에 떨어진다. 한겨울마다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9.13
구월 구월 혜원 박영배 언젠가 당신이 달빛으로 다녀간 마음 한구석 소슬바람에 생채기가 덧나 속앓이가 생겼습니다 밤마다 저며오는 고요, 이슬의 숨소리를 들으며 뒤척이는 마른 잎사귀들 몸을 감춘 산 그림자 당신 닮은 어둠은 눈물 꽃으로 활짝 피어나 악성 류머티스 같은 생채기에 나는 ..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08.30
사연 - 도종환 사연 - 도종환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08.27
스며드는 것 - 안도현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쩔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22
사랑도 나무처럼 / 이해인 사랑도 나무처럼 / 이해인 사랑도 나무처럼 사계절을 타는 것일까 물오른 설레임이 연둣빛 새싹으로 가슴에 돋아나는 희망의 봄이 있고 태양을 머리에 인 잎새들이 마음껏 쏟아내는 언어들로 누구나 초록의 시인이 되는 눈부신 여름이 있고 열매 하나 얻기 위해 모두를 버리는 아픔으로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21
벽지 (외 2편)—가정법원, 여자의 진술 /최은묵 벽지 (외 2편) —가정법원, 여자의 진술 최은묵 나는 벽에 달라붙어 살았다 움켜쥔 손톱은 짓물렀고 등은 시렸다 이제 나는 지치고 늙어 그만 벽에서 내려오려 한다 지금껏 나는 혼자 단단한 줄 알았으니 못에 뚫린 자리는 비로소 바람에 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건 구멍이 아니라 들..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20
단추-문숙 단추 - 문숙 장롱 밑에 떨어진 단추 어둠에 갇혀 먼지더미에 푹 파묻혀 있다 어느 가슴팍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까 한 사람을 만나 뿌리 깊게 매달렸던 시절을 생각한다 따스하게 앞섶을 여며주며 반짝거리던 날들 춥고 긴 골목을 돌아나오며 한 사람의 생애가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채..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15
찬비 내리고 -나희덕 찬비 내리고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8.15
바람이 오면 -도종환 바람이 오면 -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가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 ...Sarah McLachlan - I Love You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08.09
빛은 얼마나 멀리서 빛은 얼마나 멀리서 / 나희덕 저 석류나무도 빛을 찾아나선 삶이기는 마찬가지, 주홍빛 뾰족한 꽃이 그대로 아, 벌린 집이 되어 햇빛을 알알이 끌어모으고 있다 불꽃을 얻은 것 같은 고통이 붉은 잇몸 위에 뒤늦게 얹혀지고 그동안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사랑의 잔뼈들이 멀리서 햇살이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8.07
오빠가 되고 싶다/ 임보 오빠가 되고 싶다/ 임보 나팔바지에 찢어진 학생모 눌러 쓰고 휘파람 불며 하릴없이 골목을 오르내리던 고등학교 2학년쯤의 오빠가 다시 되고 싶다 네거리 빵집에서 곰보빵을 앞에 놓고 끝도 없는 너의 수다를 들으며 들으며 푸른 눈썹 밑 반짝이는 눈동자에 빠지고 싶다 버스를 몇 대 보..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06
곰보 누이/광토 김인선 곰보 누이 炚土 김인선 천연두 열꽃 피어 떨어진 자리마다 서러움 가득 고여 얼마나 슬펐을까 움푹 팬 살 구덩이에 가둔 아픔 뉘 아랴 창밖의 탱자나무 가시에 걸린 달도 제 곰보 가리려고 은빛을 뿌리는 밤 애달픈 달무리 보며 눈물조차 났겠나 겹겹이 바른 분칠 행여나 눈치챌까 새빨간..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03
첫 만남/문정희(릴케를 위한 연가) 戀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대 영혼을 만지지 못하고 어찌 나의 영혼을 간직할 수 있나요? 어떻게 그것을 넘어 다른 것으로 높일 수 있을까요? 오! 칠흑 같은 어둠 그 어느 상실한 것의 옆에 깊은 당신의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낯설고 아득한 그곳에 나의 영혼을 머물게 하고 싶..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7.30
구두 한 짝-이진수 구두 한 짝-이진수 비 맞고 있다 개나리 덤불 후미진 데 버려진 구두 한 짝, 발이 아닌 흙덩이를 신었다 어디서 어떻게 기막히게 알았는지 어린 채송화가 와 뿌리내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의 추억과 냄새가 눈시울을 흔들어 놓기도 했지만 끈 떨어지고 뒤축 닳은 뒤에도 세상 넓어 누..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7.22
구두 수선공 - 최일걸 구두 수선공 - 최일걸 그는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더듬는다 뒤엉킨 길들을 풀어놓으려는 그의 손마디가 저릿하다 시한폭탄을 해체할 때처럼 진땀나는 순간, 자칫 잘못 건드리면 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거나 뜀박질이 그의 심장을 짓밟고 지나갈 것이다 자꾸 엇박자..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7.20
얼굴반찬 -공광규 얼굴반찬-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