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 400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고정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덕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남도 천리길에 깔린세상의 온갖 잔소리들이방생의 시냇물 따라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들 뒤에서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톱을 툭,치며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인생의 뒤안길로 사라진다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둥근 여백이여 길이여모든 부재 뒤에 살아있는 존재여쓸쓸함이랑 여백이구나, 큰 여백이구나헤어짐이랑 여백이구나, 큰 여백이구나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아니면네 발 아래로 흘러가는 시냇물 ..

여름날 / 김사인

여름날 /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