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아비가 오다/광토 김인선

라포엠(bluenamok) 2014. 9. 13. 00:44

  

아비가 오다

               炚土 김인선

 

 

 

아마

생전의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해가 지기 전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이들 부지런히 오라하고 서둘러 아침부터 미리 제상을 정성껏 차려야 할 것이다.

 

북어의 주둥이와 꼬리를 자르자

부스스 하얀 가루가 한 움큼 방바닥에 떨어진다.

한겨울마다 아비가 내의 갈아입고 나서 거친 손바닥으로 콩기름 먹인 장판 훑어내면 수북이 모였던 살 비듬

그 가루가 지금 떨어지고 있다.

 

아비의 살가죽이 아직도 마르고 있나

이 못난 자식 정강이도 바짝 말라 벌써 흰 살 꽃이 피어 부서져 내리는데

일 년 만에 반가운 걸음 한 아비 혼이 모처럼 아늑한 방에서 속내의를 갈아입나 보다.

 

돌 같던 장딴지를 모진 세월이란 놈이 얼마나 두드렸는지

찬바람에 얼고 녹으며 마른 북어처럼 딱딱한 뼈만 남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다리를 보듬었던 속내의 솔기에 잔뜩 숨겼던 삶의 증표

그날처럼 내 앞에서 폴폴 날린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 했나

헌 옷 벗고 새 옷 갈아입는 아비의 모습을 보는 듯 나는 어느새 이승을 떠나 아비 곁으로 간다.

 

말간 식혜를 오른쪽에 올리고 푸석하게 마른 북어를 왼쪽에 올리니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치는 지난 시절

어릴 적 나는 아비의 고독한 생의 소리를 종종 들었고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귀뚜리 날개가 차가운 달빛을 비벼댈 때

장독대에 구슬프게 내려앉던 창부타령 그것은 허무한 인생을 재우는 노랫가락 소리였고

졸음 못 이겨 깜빡거리는 별 보며 새벽밥 먹을 때 

깨진 어금니에 부딪히던 놋숟가락 소리 그것은 고단한 인생을 씹어 하루를 깨우던 기막힌  생의 소리였다.

 

아비의 십팔 번인 창부타령

황해도 해주

고향에서 어린 시절 창을 배우다만 것이 늘 아쉬웠는지 눈 지그시 감고 부르던 모습

허파를 울리고 나온 창은 장마통 미루나무에 붙은 참매미가 징검다리 구름 딛고 가는 쪼개진 햇볕 쬐느라

젖었던 날개를 부지런히 비비대는 소리였고

제 모르게 찬 서리가 내려 가을이 깊어가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던 귀뚜라미의 울음 같았다.

 

길게 뽑아내는 가락

그 속에는 흙바람 벽 밑을 쉼 없이 들락대는 개미처럼 고된 삶의 애환이 굽이굽이 배어 있었고 

베짱이의 꿈을 바라면서 잔걸음 기어야 했던 아비였기에 어깨를 덩실거릴 흥겨운 가락을 일부러 슬프게 감아올리며

구성지게 편곡한 마음의 절규였다. 

 

하지만 아직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어머니가 '네 아비를 절대 닮지 마라'하고 내게 하던 소리다.

어미가 왜 그랬을까

혹 내 아들도 그 소리 듣고 컸을까

아내도 아들에게도 그리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홍동백서 좌포 우혜

어동육서 우반 좌갱 줄 맞추어 다 차리고 향 피우니 돌연 말소리가 들린다.

'애야 본 지 오래니 내 무덤에 한번 다녀가거라'

 

여름내 초록 잔디 끝에 매단 마른 눈으로 자식 생각 

이따금 지나치는 낯 모를 발걸음조차 반가워 벌떡 일어나 바라보았으리라.

 

이제 조금 후면 찬 서리에 눈 끝이 부서져 잔디도 다 죽을 텐데 얼어붙은 흙무더기 속 얼마나 차가우랴

장작더미 쌓아 불 피우며 한겨울 곁에 있어도 갚지 못할 은혜

늘 소주 한 잔 뿌리고 훌쩍 도망오던 이 못난 놈의 불효를 어찌해야 하나.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바람 매워지면 생전의 아버지처럼 하얀 쌀 몇 포대 사 놓고요

손자놈 방한복 사 입히고 어머니 집에 보일러도 손보고 넉넉하게 용돈도 드릴게요

산 사람이 먼저라고 늘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불효한 놈 용서하세요

밖에 나오지 말고 봄까지 참고 누워 계세요

아이들 데리고 가끔 갈게요

 

문득 지난 추석 때 

임진강 하구 둘러친 철조망의 틈마다 끼워 놓은 돌멩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앞에 보이는 고향 땅

가슴 복받치는지 뛰쳐나오려 듯

뾰족이 머리 내민 아비 모습 아니었나.

 

음복 하려고 보니

상에 놓인 음식이 역시나 그대로이다.

아비는 할아버지의 성질 닮고 할아버지는 당신 아버지의 성질 닮아 오늘도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저 세상

어디인지 가보지 않았으니

모처럼 차린 정성이 그곳에서 보이는 건지 안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보고 싶은 아픔을 삭이며 불러 볼뿐

아버지

앞에 꺼내놓은

새 내복 입으셨죠...

                                 

 

어동육서 우반좌갱

두 번 절에 머리 조아리며 반절 한다

 

그대로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성질 그대로 닮고

할아버지는 당신 아버지의 성질 똑 닮았을 터

오늘도

어느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맛없는가

아니

불효한 놈 정성이 부족한 탓일 게다

 

훌훌

향 연기만 삼색 전을 훑고 가는데

아, 아버지

오긴

정말 오셨나요


-'아비의 기일'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