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기도 2 / 마종기 겨울 기도 2 / 마종기 1이 겨울에도 채워주소서 며칠째 눈 오는 소리로 마음을 채워 손 내밀면 멀리 있는 약속도 느끼게 하시고 무너지고 일어서는 소리도 듣게 하소서 떠난 자들도 당신의 무릎에 기대어 포근하게 긴 잠을 자게 하소서 왜 깨어 있지 않았느냐고 꾸짖지 마시고 당신에게 교..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1.19
지평선 / 위선환 지평선 / 위선환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1.17
결빙의 아버지 / 이수익 (1942∼ ) 결빙의 아버지 / 이수익 (1942∼ )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1.16
가슴 아픈 것은 다 소리를 낸다 - 김재진 가슴 아픈 것은 다 소리를 낸다 - 김재진 별에서 소리가 난다 산 냄새 나는 숲 속에서 또는 마음 젖는 물가에서 까만 밤을 맞이할 때 하늘에 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자작나무의 하얀 키가 하늘 향해 자라는 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겨울은 더 깊어 호수가 얼고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1.12
서정시인 - 나태주 서정시인 - 나태주 다른 아이들 모두 서커스 구경 갈 때 혼자 남아 집을 보는 아이처럼 모로 돌아서서 까치집을 바라보는 늙은 화가처럼 신도들한테 따돌림당한 시골 목사처럼. <산촌엽서> 문학사상 2002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1.10
낮은 목소리로 - 김후란 낮은 목소리로 - 김후란 이제 남은 한 시간 낮은 목소리로 서로의 가슴을 열기로 하자 잠든 아기의 잠을 깨우지 않는 손길로 부드럽게 정겹게 서로의 손을 잡기로 하자 헤어지는 연습 떠나가는 연습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흰 머리칼 하나 발견하듯 이해의 강을 유순히 따라가며 서로의 눈..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5.12.26
인연서설 - 문병란 인연서설 -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5.12.23
시인의 꼬리 - 조경숙 시인의 꼬리 - 조경숙 ​ 시 쓰는 걸 재주라고 하나 이미 글을 봐서 알겠지만 내 재주란 물구나무서기도 못하는데 몇 개의 꼬리를 달고 공중회전을 하여야하나 ​ 어려서 서커스를 볼 때 할머니 그랬다 저렇게 몸을 돌돌 말아 공중돌기를 하다가 작은 상자에 들어가려면 식초를 매..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5.12.18
소망 / 김후란 소망 / 김후란 생애 끝에 오직 한 번 화사하게 꽃이 피는 대나무처럼 꽃이 지면 깨끗이 눈 감는 대나무처럼 텅 빈 가슴에 그토록 멀리 그대 세워 놓고 바람에 부서지는 시간의 모래톱 벼랑 끝에서 모두 날려버려도 곧은 길 한 마음 단 한 번 눈부시게 꽃 피는 대나무처럼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5.12.16
詩를 찾아서 - 정희성 詩를 찾아서 - 정희성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5.12.02
기도 - 서정주 기도 - 서정주 저는 시방 꼭 텅 빈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텅 빈 들녘 같기도 합니다. 하늘이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안에 두시든지, 날으는 몇 마리의 나비를 두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가니와 같이 하시든지 마음대로 하소서.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어진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5.11.25
11월 - 배한봉 11월 - 배한봉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5.11.12
11월의 어머니 - 윤준경 11월의 어머니 - 윤준경 11월 들판에 빈 옥수숫대를 보면 나는 다가가 절하고 싶습니다 줄줄이 업어 기른 자식들 다 떠나고 속이 허한 어머니 큰애야, 고르게 돋아난 이빨로 어디 가서 차진 양식이 되었느냐 작은애야, 부실한 몸으로 누구의 기분 좋은 튀밥이 되었느냐 둘째야, 넌 단단히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5.11.08
눈빛으로 말하다/나호열 눈빛으로 말하다/나호열 떠나보지 않은 사람에게 기다려 보지 않은 사람에게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잔뜩 움켜쥐었다가 제 풀에 놓아 버린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독약 같은 그리움은 찾아오지 않는다 달빛을 담아 봉한 항아리를 가슴에 묻어 놓고 평생 말문을 닫은 사람 눈빛으로 보고 눈빛..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5.10.25
새-아버지학교 9/이정록 새 아버지학교 9 숫눈이 내렸구나. 마당 좀 봐라. 아직 녹지 않은 흰 줄 보이지? 빨랫줄 그늘 자리다. 저 빨랫줄도 그늘이 있는 거다. 바지랑대 그림자도 자두나무처럼 자랐구나. 아기 주먹만한 흰 새 다섯 마리는, 빨래집게 그림자구나. 햇살 받으면 새도 날아가겠지. 젖은 자리도 흔적 없..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5.01.02
동행-이상윤 동 행-이상윤 일생동안 사랑, 기쁨 그리고 희망 이 모든 것들은 붙들려 애써 봤지만 쉽게 떠났지 아니, 애원할수록 더 빨리 떠났지 모든 게 다 떠난 후에도 가슴을 조아려 내 곁에 머물러 준 것은 슬픔 그것뿐이더라 Love On The Autumn Road(낙엽위의 연인) - T.S Nam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10.07
애인 있어요- 홍성란 애인 있어요- 홍성란 노래자랑에 입상하신 여든한 살 할머니가 분홍셔츠에 흰 바지 차려입고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다소곳 환히 부르네 숨은 턱에 찼으나 손 모아 파르르 입술 모아 애인 있어요, 말 못한 애인 있다니 여든넷 어머니 그늘 겹쳐오네 새치 뽑던 파마머리 젖가슴 뭉클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9.30
앗싸, 죽은 여자 / 황봉학 앗싸, 죽은 여자 / 황봉학 나의 지갑 속에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죽어 있다. 어떤 때는 죽은 남자를 팔아 산 여자를 사기도 하는데 앗싸노래방에서 도우미를 신청하고 죽은 남자를 내밀면 아주 효험이 있다. 운이 좋으면 쭉쭉빵빵인 아가씨를 사기도 하고 막 요염이 덧칠해진 30대 여인을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9.25
아비가 오다/광토 김인선 아비가 오다 炚土 김인선 아마 생전의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해가 지기 전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이들 부지런히 오라하고 서둘러 아침부터 미리 제상을 정성껏 차려야 할 것이다. 북어의 주둥이와 꼬리를 자르자 부스스 하얀 가루가 한 움큼 방바닥에 떨어진다. 한겨울마다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9.13
스며드는 것 - 안도현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쩔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