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박기섭 책 - 박기섭 아버지, 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 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 그 밖의 많은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지, 라는 책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 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19
한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김재진 Ⅰ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그때 그 용서할 수 없던 일들 용서할 수 있으리. 자존심만 내세우다 돌아서고 말던 미숙한 첫사랑도 이해할 수 있으리. 모란이 지고 나면 장미가 피듯 삶에는 저마다 제 철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찬물처럼 들이키리.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나..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13
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빨을 뽑아 지..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06
미완성을 위한 연가 - 김승희 미완성을 위한 연가 - 김승희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려는 저물 무렵 단애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는 서로에게 깊이 말하고 있었네 하나의 손과 손이 어둠 속을 헤매어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05
하늘색나무대문집 /권대웅 하늘색나무대문집 / 권대웅 십일월의 집에 살았습니다 종점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얼키설키 모인 집들과 몇 개의 텃밭을 지나 막다른 골목 계단 맨 끝 문간방 그 집에서 오랫동안 가을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창문 밑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나팔꽃, 해바라기 저녁의 적막을 어..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6.30
장독대가 있던 집 / 권대웅 장독대가 있던 집 / 권대웅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6.29
기다리는 행복/이해인 기다리는 행복/이해인 온 생애를 두고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수수한 옷차림의 기다림입니다 겨울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처럼 나의 언어를 익혀 내 복된 삶의 즙을 짜겠습니다 밀물이 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이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5.28
인연 - 이사라 인연 - 이사라 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렇지 처음에는 없는 것이 생겼다가 다시 없어졌다가 그래도 남아 있는 모래언덕처럼 우리는 조용한 모래 꿈꾸는 모래였지 고요한 곳에서 혼자 멈춰 있던 고운 입자 바람과 만나야 살아나서 둘이어야 춤추게 되어서 그러다가도 또 바람 때문에..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5.08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견뎌내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견뎌내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견뎌내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견뎌내는 것… 이것만이 인생이고, 기쁨이며, 왕국이고, 승리이다” - ‘해방된 프로메테우스’ Percy Bysshe Shelley 남자는 여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여자가 모든 것을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5.07
아스피린 / 김미옥 아스피린 / 김미옥 할머니는 토끼표 ABC로 이산의 슬픔을 이기셨고 어머니는 종근당 사리돈으로 가난을 견디셨다 사는 건 고통이고 진통제는 희망이었다 둘 사이는 이스트로 부푼 빵처럼 화기가 아랫목에 가득했고 부풀고 부풀다 가끔 터지기도 했는데, 미워하지도 않았지만 서로 불쌍해..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5.05
오월의 느티나무 - 복효근 오월의 느티나무 - 복효근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중인가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 연초록의 저 연초록 입술들 아마도 이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 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초록의 그늘 아래 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어떻게 다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5.03
푸른 오월 - 노천명 푸른 오월 - 노천명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5.03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사는 일은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국수가 먹고싶다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길거리에 나서면고향 장거리 길로소 팔고 돌아오듯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국수가 먹고싶다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어느 곳에선가늘 울고싶은 사람들이 있어마음의 문들은 닫히고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눈물자국 때문에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국수가 먹고싶다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4.29
악보-도종환 악보-도종환 상가 꼭대기에서 아파트 쪽으로 이어진 여러 줄의 전선 끝에 반달이 쉼표처럼 걸려 있다 꽁지가 긴 새들과 초저녁별 두어 개도 새초롬하게 전깃줄 위에 앉아 있다 돌아오는 이들을 위해 하늘에다 마련한 한 소절의 악보 손가락 길게 저어 흔들면 쪼르르 몰려나와 익숙한 가..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4.25
오래된 독서 - 김왕노 오래된 독서 - 김왕노 서로의 상처를 더듬거나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누구에게나 오래된 독서네. 일터에서 돌아와 곤히 잠든 남편의 가슴에 맺힌 땀을 늙은 아내가 야윈 손으로 가만히 닦아 주는 것도 햇살 속에 앉아 먼저 간 할아버지를 기다려 보는 할머니의 그 잔주름 주름을 조..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4.14
앉은뱅이 밥상 하나가 / 서수찬 앉은뱅이 밥상 하나가 / 서수찬 앉은뱅이 밥상 하나 네 다리 중 흔들리는 다리 하나에 테이프를 칭칭 감아 안 보이는 쪽으로 돌려놓아도 거기 화살처럼 꽂히는 눈들 밥 얻어먹는 내내 내 마음도 테이프를 붙이게 되는데 밥을 다 먹고 난 뒤 밥상이 테이프를 붙인 다리마저 접고 냉장고 뒤..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4.13
신설동 밤길 - 마종기 신설동 밤길 - 마종기 약속한 술집을 찾아가던 늦은 저녁, 신설동 개천을 끼고도 얼마나 어둡던지 가로등 하나 없어 동행은 무섭다는데 내게는 왜 정겹고 편하기만 하던지. 실컷 배웠던 의학은 학문이 아니었고 사람의 신음 사이로 열심히 배어드는 일, 그 어두움 안으로 스며드는 일이었..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4.11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나호열 ↓↓아래부터 복사 하세요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출렁거리는 억 만 톤의 그리움 푸른 하늘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혼자 차오르고 혼자 비워지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리움의 저수지 머리에 이고 물길을 찾아갈 때 먹장구름은 후두둑 길을 지워버린다 어디에서 오시는가 저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4.09
동시/섣달그믐 - 송근영 섣달그믐 - 송근영 새해 아침 차례상 앞줄 왼쪽 두 번째에 놓을 밤을 깎으시는 할아버지 손자가 마주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할아버지 눈썹은 왜 희어지셨어요?" "오늘 같은 섣달 그믐에 잠을 자서 그렇단다." "저도 오늘 밤에 자면 눈썹이 한 올쯤은 희어지겠네요." "암, 그렇다마다." 한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2.08
목련꽃 지던 날- 김은우 목련꽃 지던 날- 김은우 외할머니는 뒷마당 오래된 목련나무에 병든 딸의 목숨 줄 이어놓고 날마다 애타는 소원 하나씩 가지 끝에 달아 놓았다 할머니가 삐뚤삐뚤 쓴 종이 하나가 뒷마당 유난히도 붉은 우듬지에서 펄럭일 때 아픈 허리는 우물가에 앉아 통증도 잊은 채 커다란 가마솥을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