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나무처럼 / 이해인 사랑도 나무처럼 / 이해인 사랑도 나무처럼 사계절을 타는 것일까 물오른 설레임이 연둣빛 새싹으로 가슴에 돋아나는 희망의 봄이 있고 태양을 머리에 인 잎새들이 마음껏 쏟아내는 언어들로 누구나 초록의 시인이 되는 눈부신 여름이 있고 열매 하나 얻기 위해 모두를 버리는 아픔으로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21
벽지 (외 2편)—가정법원, 여자의 진술 /최은묵 벽지 (외 2편) —가정법원, 여자의 진술 최은묵 나는 벽에 달라붙어 살았다 움켜쥔 손톱은 짓물렀고 등은 시렸다 이제 나는 지치고 늙어 그만 벽에서 내려오려 한다 지금껏 나는 혼자 단단한 줄 알았으니 못에 뚫린 자리는 비로소 바람에 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건 구멍이 아니라 들..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20
단추-문숙 단추 - 문숙 장롱 밑에 떨어진 단추 어둠에 갇혀 먼지더미에 푹 파묻혀 있다 어느 가슴팍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까 한 사람을 만나 뿌리 깊게 매달렸던 시절을 생각한다 따스하게 앞섶을 여며주며 반짝거리던 날들 춥고 긴 골목을 돌아나오며 한 사람의 생애가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채..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15
오빠가 되고 싶다/ 임보 오빠가 되고 싶다/ 임보 나팔바지에 찢어진 학생모 눌러 쓰고 휘파람 불며 하릴없이 골목을 오르내리던 고등학교 2학년쯤의 오빠가 다시 되고 싶다 네거리 빵집에서 곰보빵을 앞에 놓고 끝도 없는 너의 수다를 들으며 들으며 푸른 눈썹 밑 반짝이는 눈동자에 빠지고 싶다 버스를 몇 대 보..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06
곰보 누이/광토 김인선 곰보 누이 炚土 김인선 천연두 열꽃 피어 떨어진 자리마다 서러움 가득 고여 얼마나 슬펐을까 움푹 팬 살 구덩이에 가둔 아픔 뉘 아랴 창밖의 탱자나무 가시에 걸린 달도 제 곰보 가리려고 은빛을 뿌리는 밤 애달픈 달무리 보며 눈물조차 났겠나 겹겹이 바른 분칠 행여나 눈치챌까 새빨간..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8.03
구두 한 짝-이진수 구두 한 짝-이진수 비 맞고 있다 개나리 덤불 후미진 데 버려진 구두 한 짝, 발이 아닌 흙덩이를 신었다 어디서 어떻게 기막히게 알았는지 어린 채송화가 와 뿌리내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의 추억과 냄새가 눈시울을 흔들어 놓기도 했지만 끈 떨어지고 뒤축 닳은 뒤에도 세상 넓어 누..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7.22
구두 수선공 - 최일걸 구두 수선공 - 최일걸 그는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더듬는다 뒤엉킨 길들을 풀어놓으려는 그의 손마디가 저릿하다 시한폭탄을 해체할 때처럼 진땀나는 순간, 자칫 잘못 건드리면 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거나 뜀박질이 그의 심장을 짓밟고 지나갈 것이다 자꾸 엇박자..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7.20
얼굴반찬 -공광규 얼굴반찬-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7.20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이외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이 외 수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7.15
나비수건 - 어머니학교 4/이정록 나비수건 - 어머니학교 4 이정록 고추밭에 다녀오다가 매운 눈 닦으려고 냇가에 쪼그려 앉았는데 몸체 보시한 나비 날개, 그 하얀 꽃잎이 살랑살랑 떠내려가더라. 물속에 그늘 한 점 너울너울 춤추며 가더라. 졸졸졸 상엿소리도 아름답더라. 맵게 살아봐야겠다고 싸돌아다니지 마라. 그늘..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7.11
은행나무 부부 - 반칠환 은행나무 부부 - 반칠환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7.10
자화상-서정주 자화상-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꽂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6.28
모란이 피네-송찬호 모란이 피네-송찬호 외로운 홀몸 그 종지기가 죽고 종탑만 남아 있는 골짜기를 지나 마지막 종소리를 이렇게 보자기에 싸 왔어요 그게 장엄한 사원의 종소리라면 의젓하게 가마에 태워 오지 그러느냐 혹, 어느 잔혹한 전쟁처럼 코만 베어 온 것 아니냐 머리만 떼어 온 것 아니냐, 이리 투..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5.24
그대 오는 길 등불 밝히고-이해인 그대 오는 길 등불 밝히고-이해인 내가슴 깊은 곳에 그리운 등불하나 켜 놓겠습니다 사랑하는 그대 언제든지 내가 그립걸랑 그 등불 향해 오십시오 오늘 처럼 하늘 빗 따라 슬픔이 몰려오는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 위해 기쁨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삶에 지쳐 어깨가 무겁게 느껴..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5.22
하지정맥류-이영혜 하지정맥류-이영혜 언제부턴가 엄마의 다리에 검푸른 길이 솟아올랐다 곧 바닥을 드러낼, 경작할 수 없는 칠순의 폐답(廢畓) 가늘어진 팔과 다리 창백한 살빛 아래 드러난 고지도(古地圖)를 읽는다 저 길을 밟아 밥을 벌어 오고 수십 번 이삿짐을 옮겼을, 저 길에서 나의 길도 갈라져 나왔..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5.14
詩가 된 이름 /山雲 신현복 詩가 된 이름 / 山雲 신현복 나도 이름이 있어요 무심코 풀꽃이라 외면하면 나 싫습니다 그런 날에는 언덕은 바람 한 줌 쥐어주고 바쁜 노랑나비 잠시 앉아 위로하다 가요 그런 날에는 당신 입에 내 이름을 알려주세요 달팽이가 싱싱하게 알아챈 애기똥풀이라고 나, 그 음성 들릴까 당신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5.11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 있다-김광렬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 있다-김광렬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 있다 덜컹덜컹, 때로는 미끄러지듯 내가 닿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 그리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바퀴가 굴러 가는 속도는 빠르다 어느새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닿아 있다 너는 모르지 너의 곁에 내가 있다는 것을 지금 바로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5.08
삶이여, 사랑이여/김영주 삶이여, 사랑이여 김 영 주 한뼘 만큼 늘 그 자리인 아내 거기서 꽃바람이 불어오지 오너라 아내여 그대 달뜨게 하는 내 가슴 한쪽을 잘라 피리를 불어주마 스무 몇 살적 내게로 와서 사랑이 되듯 서로 오래인 등에 기대어 소금빛 마알간 서해 바다 부초처럼 떠서 살다가 어느날 우리가 너..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5.06
장미-노천명 장미-노천명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나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노천명 盧天命 (1912. 9...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5.03
위험한 평화-이화은 위험한 평화-이화은 당신은 지금 세 접시째 만월 같은 뷔페 음식을 비우고 있는 중이다 사자는 일주일을 굶고 교미를 한다는데 굶은 사자의 눈빛을 가정에서 찾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위험이 사라진다고 다 평화가 오는 건 아니다 남자에게서 위험을 빼면 남편이 된다 변변한 죄 한 벌 없..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4.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