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호에서 천장호에서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술만이 빛나고 있을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맹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Марк Олич (마..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12.13
심장을 켜는 사람 심장을 켜는 사람 나희덕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 피가 돌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12.07
빈 의자 빈 의자 / 나희덕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11.07
푸른 밤 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11.07
젖지 않는 마음/나희덕 젖지 않는 마음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10.28
너무 많이 너무 많이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10.07
슬픈 몸-문정희 슬픈 몸-문정희 불 속에서 짐승의 눈알을 보고 돌 속에서 숨 쉬는 사내를 꺼낸 적도 있지만 정작 내 몸은 내가 몰라 오늘은 나약하고 가련한 원숭이가 된다 내 몸을 읽어 달라! 종합병원 기계 앞에 나를 벗는다 밟을수록 깊게 파이는 시간이라는 늪지에 사는 나는 절지동물 절뚝이며 절뚝..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10.01
흩으시든가 괴시든가/고정희 흩으시든가 괴시든가/고정희 하느님 죄없는 강물에 불지르는 저 열사흘 달빛을 거두어들이시든가 어룽어룽 광을 내는 내 눈물샘 단번에 절단내시든가 건너지 못할 강에 다리 하나 걸리게 하.시.든.가 하느님 시월 상달 창틀 밑에 밤마다 우렁차게 자진하는 저 풀벌레 울음을 기어코 흩으..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10.01
사라진 손바닥-나희덕 사라진 손바닥-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9.16
찬비 내리고 -나희덕 찬비 내리고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8.15
빛은 얼마나 멀리서 빛은 얼마나 멀리서 / 나희덕 저 석류나무도 빛을 찾아나선 삶이기는 마찬가지, 주홍빛 뾰족한 꽃이 그대로 아, 벌린 집이 되어 햇빛을 알알이 끌어모으고 있다 불꽃을 얻은 것 같은 고통이 붉은 잇몸 위에 뒤늦게 얹혀지고 그동안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사랑의 잔뼈들이 멀리서 햇살이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8.07
첫 만남/문정희(릴케를 위한 연가) 戀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대 영혼을 만지지 못하고 어찌 나의 영혼을 간직할 수 있나요? 어떻게 그것을 넘어 다른 것으로 높일 수 있을까요? 오! 칠흑 같은 어둠 그 어느 상실한 것의 옆에 깊은 당신의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낯설고 아득한 그곳에 나의 영혼을 머물게 하고 싶..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7.30
숲 속의 비망록 숲 속의 비망록-문정희 여름 숲 속 창작 교실에 갔다가 그만 폭우에 갇히고 말았다 외딴 흙 집 알전구에 매달려 박쥐와 함께 온 밤을 퍼덕이었다 충혈된 짐승털 냄새를 풍기며 폭우가 밤새 달려들었다 이윽고 안개가 베일을 벗자 어디서 걸어왔는지 희뿌연 아침이 이마를 드러냈다 풀들..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6.06
유리창을 닦으며 유리창을 닦으며-문정희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져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져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31
알몸의 시간 알몸의 시간-문정희 옷 한 벌 사려고 상가를 돌았다 내게 맞는 옷은 좀 체 없었다 조금 크거나 작거나 디자인이 맘에 안 들었다 세상의 옷들은 공주나 말라깽이 배우들을 위한 것뿐이었다 옷들은 대뜸 뚱뚱한 내 몸매부터 비웃었다 슬며시 부아가 나서 한 번 입어나 보려고 다리를 넣었다..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29
달팽이 달팽이-문정희 여름에도 얇은 살 얼음을 덮고 사는 속살이 부드러운 누이 미루나무 속잎 피는 강가 코흘리개 동생을 오글오글 등에 업고 진흙 같은 생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간다 사방에 벼랑은 이리도 많아 마치 출가승처럼 근신하다가 풀잎 끝에서도 곧잘 긴 귀를 뽑아 먼 곳을 바라보..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26
유산 상속 유산 상속-문정희 비밀이지만 아버지가 남긴 폐허 수만 평 아직 잘 지키고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척박한 그 땅에 태풍 불고 토사가 생겨 때때로 남모르는 세금을 물었을 뿐 광기와 슬픔의 매장량은 여전히 풍부하다 열다섯 살의 입술로 마지막 불러본 아버지! 어느 토지 대장에도 번지..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25
찔레꽃 찔레꽃-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24
그대 생각-고정희 그대 생각-고정희 아침에 오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저녁에 십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꿈길에서 십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꿈 깨고 오십 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무심함쯤으로 하늘을 건너가자 바람처럼 부드럽게 그대를 지나가자 풀꽃으로 도장 찍고 한달음에 일주일쯤 달려가지만 내가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