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생각-고정희 그대 생각-고정희 아침에 오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저녁에 십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꿈길에서 십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꿈 깨고 오십 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무심함쯤으로 하늘을 건너가자 바람처럼 부드럽게 그대를 지나가자 풀꽃으로 도장 찍고 한달음에 일주일쯤 달려가지만 내가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18
내가 화살이라면 -문정희 내가 화살이라면 -문정희 내가 화살이라면 오직 과녁을 향해 허공을 날고 있는 화살이기를 일찍이 시위를 떠났지만 전율의 순간이 오기 직전 과녁의 키는 더 높이 자라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팽팽한 허공 한가운데를 눈부시게 날고 있음이 전부이기를 금빛 별을 품은 화살촉을 달고 내가..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17
남편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15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문정희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문정희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 아무 의도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 나의 운명과는 상관도 없지만 별!을 나는 좋아한다. 별이라고 말하며 흔들린다. 아..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09
아카시아 아카시아 / 나희덕 저무는 봄날 하얀 비 맞으며 나는 그 길 위로 걸어왔습니다 숨막힐 듯 단내 나던 꽃송이 산산이 부서져 뼛가루처럼 어디론가 불려가는 날, 마른 꽃잎을 한 줌 움켜보니 금방이라도 소리를 낼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한숨을 잘 쉬시던지 모두 여기 날아와 쌓인 듯..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07
살아 있어야 할 이유 살아 있어야 할 이유 나희덕 가슴의 피를 조금씩 식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 가슴을 문질러 온갖 열망과 푸른 고집들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여.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 저리도 눈부시고 환한 일이라고 땅에 뒹굴면서도 말하는 이여. 한 번은 제 슬픔의 무게에 물들..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07
시 속에서 자유롭고 용감하고 아름다운 그녀/문정희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가고 가고 가는 것들 아름다워서// 주고 주고 주는 것들 풍요로워서// 돌이킬 수 없어 아득함으로/ 돌아갈 수 없어 무한함으로// 부르르 전율하며/ 흐르는 강물// (‘물시’ 부분) 책을 가까이 하고 싶은 계절이다. 서점에 깔린 수많은 책 가운데 한 권의 시..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07
신록-문정희 신록 / 문정희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구나 솔개처럼 푸드득 날고만 싶은 눈부신 신록, 예기치 못한 이 모습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지난 겨울 깊이 박힌 얼음 위태로운 그리움의 싹이 돋아 울고만 싶던 봄날도 지나 살아 있는 목숨에 이렇듯 푸른 노래가 실릴 줄이야 좁은 어깨를 맞..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5.04
손의 고백 / 문정희 손의 고백 / 문정희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4.16
눈물 흘리기 눈물 흘리기 -문정희 항아리에 받았더라면 열두 번 머리를 감고 열두 번 목욕을 하고도 남았을 나의 눈물을 오늘은 키 큰 나무 무성한 잎에다 알알이 매달아 두리 바람 불면 후두둑 떨어져 풀들의 발가락 하얗게 씻어주리 그 힘으로 풀들이 일어서고 땅속 깊이 새로 강이 태어나고 지난해..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4.10
찔레 찔레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4.09
소식 소식/나희덕 서늘해지는 바람에서 그대 소식 듣습니다. 거리를 떠도는 걸 보았다고도 하고, 서릿발 일어서는 들판의 후미진 구석에서 길 잃은 고라니 새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고도 하고. 바람은 늘 거대하게 날개 편 풍문의 새와도 같습니다. 무사하신지요. 한때는 그대가 치자꽃 핀 울..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4.07
채탄 노래 채탄 노래 -문정희 마음을 파들어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일 모래 저녁답쯤에는 지평선이 보일까. 그리움이 끝난 그곳에는 타버린 나무들이 무더기 무더기 쓰러져 있을까. 얼마나 까아만 화산재가 쌓여 있을까. 슬픔의 벼랑마다 누가 서 있어서 밤마다 이토록 시를 쓰게 하는 것..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4.05
한밤중에 한밤중에-문정희 한밤중에 번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단숨에 내 심장에서 붉은 루비 같은 죄들을 꺼내 검은 하늘에 대고 펄럭이었다 낮 시간 동안 그토록 맑은 햇살을 풀어 푸른 숲과 새들을 키우던 저 산이 보낸 거라고는 믿기 어려운 번개가 한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부들부들 떨고 있..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4.01
마흔 살의 시/문정희 마흔 살의 시/문정희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4.01
즐거운 밀림의 노래/문정희 즐거운 밀림의 노래/문정희 백화점마다 모피 세일을 한 후 거리에는 때아닌 짐승들이 밀려나와 소란을 떨었다. 빌딩 사이로 밍크가 재빨리 사라지는가 하면 지하실에는 양 한 마리가 석간신문을 사고 있었다. 오리들은 남의 이불 속까지 숨어들었다지. 아이구 재미있어라, 심지어 악어들..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3.30
화장化粧을 하며 / 문정희 화장化粧을 하며 / 문정희 입술을 자주색으로 칠하고 나니 거울 속에 속국의 공주가 남아 있다 내 작은 얼굴은 국제 자본의 각축장 거상들이 만든 허구의 드라마가 명실공히 그 절정을 이룬다 좁은 영토에 만국기가 펄럭인다 금년 가을 유행 색은 섹시 브라운 샤넬이 지시하는 대로 볼연..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3.29
상한 영혼을 위하여/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2.27
한계령을 위한 연가/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2.14
너 처음 만났을 때/문정희 ♥ 너 처음 만났을 때 - 문 정 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2014.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