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마지막 산책

라포엠(bluenamok) 2015. 1. 2. 07:48

마지막 산책

 

  나희덕

 

 

 

우리는 매화나무들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은 거의 피지 않았구나,

그녀는 응달의 꽃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듯

입 다문 꽃망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땅은 비에 젖어 있었고

우리는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병실로 돌아왔다

통증이 그녀를 잠시 놓아줄 때

꽃무늬 침대 시트를 꽃밭이라 여기며

우리는 소풍 온 것처럼 차를 마시고 빵조각을 떼었다

오후에는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문장들 속으로 난 숲길을 함께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죽음, 이라는 말 근처에서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피지 않은 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

입술도 가만히 그 말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응달의 꽃은 지금쯤 피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다시 산책을 나가지 못했다

시간의 들판에서 길을 잃었는지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길을 잃은 것은 나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문학청춘》2014년 가을호

-------------

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인의 향기 > 바다 한 접시(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플러  (0) 2015.11.20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고정희   (0) 2015.01.26
천장호에서  (0) 2014.12.13
심장을 켜는 사람  (0) 2014.12.07
빈 의자  (0) 2014.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