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비망록-문정희
여름 숲 속 창작 교실에 갔다가
그만 폭우에 갇히고 말았다
외딴 흙 집 알전구에 매달려
박쥐와 함께 온 밤을 퍼덕이었다
충혈된 짐승털 냄새를 풍기며
폭우가 밤새 달려들었다
이윽고 안개가 베일을 벗자
어디서 걸어왔는지
희뿌연 아침이 이마를 드러냈다
풀들이 젖은 무릎으로
다시 떠오르는 해를 기적처럼 바라보았다
한 소년이 방문을 두드렸다
토란 잎 세숫대야에 맑은 물 채워들고
그 위에 은방울꽃 띄워놓고
어서 세수를 하라고 했다
풋풋한 시구가 첫사랑처럼 피어나는
여름 숲 속의 세숫대야 속으로
불현 듯 초록산 하나가 크게 팔을 벌리더니
숨막히게 나의 입술을 빼앗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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