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 1624

하루 요리하기

하루 요리하기 임현숙 손등에 핏줄 미로가 그려진 여자 배추통만 한 무를 자른다 큰 칼이 무 허리에 박혀 꼼짝을 안 한다 다 써가는 치약을 짜듯 파르르 떠는 입술 산다는 건 내 안의 진액을 쥐어 짜내는 것이라며 칼을 이리저리 달래 본다 미로가 산봉우리처럼 솟아나며 무가 두 동강 난다 산다는 건 한 걸음 한 걸음 산마루를 향해 오르는 것이지 산기슭이나 산허리에서 멈출지라도 걸음마다 온 힘을 다했다면 잘 살고 있는 거야 손등에 히말라야 봉우리가 푸르게 솟은 그 여자 몇 굽이 산비탈에서 하루를 깍둑썰고 있다. -림(20231101)

가을날

가을날 임현숙 하늘빛 깊어져 가로수 이파리 물들어가면 심연에 묻힌 것들이 명치끝에서 치오른다 단풍빛 눈빛이며 뒤돌아 선 가랑잎 사람 말씨 곱던 그녀랑 두레박으로 퍼올리고 싶다 다시 만난다면 봄날처럼 웃을 수 있을까 가을은 촉수를 흔들며 사냥감을 찾고 나무 빛깔에 스며들며 덜컥 가을의 포로가 되고 만다 냄비에선 김치찌개가 보글거리고 달님도 창문 안을 기웃거리는데. -림(20230930)

이민가방

이민가방 임현숙  동대문 시장 출신 이민가방 비행기 타러 간다배가 빵빵한 것이 줄행랑치는 펭귄 뒷모습이다 병 안에 모래 담듯 빈틈없이 채워져금방이라도 게울 것 같다여자의 어깨에서 가벼이 꼬리치던 핸드백이 머리에 턱 걸터앉는다'루이 xx' 이름표가 큰 바위처럼 무겁다몸값이 양반과 노비의 차이여서 초라해지지만이민가방은 날씬한 핸드백이 부럽지 않다지난날의 기억과 손때 묻은 것들다시 살 수 없는 보물을 삼킨 불룩한 배가 으쓱하다 낯선 땅에 도착해 간 쓸개까지 다 비우고 나면컴컴한 창고에 쭈그러져 출옥을 기다리는 죄수 신세이겠지만오늘만큼은 승전고를 울리는 장수처럼 당당하다'핸드백, 난 너의 모든 걸 담을 수 있지만 넌 나를 품을 수 없지'시장표 이민가방 양반걸음으로 공항을 누빈다.   -림(20230830)   ..

하얀 샌들

하얀 샌들 임 현 숙 나는 그녀의 하얀 샌들 여름이면 엄지발톱을 빨갛게 물들인 그녀와 종종 나들이를 갔다 어느 날엔 맛있는 냄새가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아줌마들의 찰진 수다가 메탈 음악처럼 귀를 뚫곤 했다 붉은 발톱은 여유로웠고 나는 더위 안에서 추위를 타곤 했다 하얀 살갗이 누레지고 주름지도록 그녀의 작은 발을 사랑하며 또각또각 동행했는데 명랑하던 그녀가 폭폭 울던 그날 이후 신발장 귀퉁이에서 몇 번의 여름을 깜깜하게 보내고 있다 그녀의 슬픈 발에는 키 작은 운동화가 날마다 따라다니고 절인 배추가 되어 돌아온 운동화에선 고달픈 하루 냄새가 배어 나온다 신발장 문이 열릴 때마다 나 여기 있다고 들썩여 봤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그 납작한 운동화만 데리고 간다 땡고추 같은 쌀쌀함이 측은하기만 ..

바로 지금

바로 지금 임현숙 이따금 카카오톡 목록을 보면 안부를 물어도 대답 없는 사람들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다가 후에 듣게 되는 소식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 만나자는 연락에 머뭇거리던 게으름이 가시로 박힌다 꽃이 시들고 가랑잎 지고 냉장고도 선풍기도 하물며 사람도 태어나는 모든 건 마지막도 있다 그 끝점은 누가 알 수 있을까! -우리 언제 얼굴 볼까요-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림(20230711)

가을 항(港)의 여름은

가을 항(港)의 여름은 임현숙  풍요로운 햇살 덕에하늘빛도채마밭도새파랗고고향을 떠나 뿌리내린 나도허릿살이 풍성해진다 생의 늦여름에 만났던낯선 땅 밴쿠버땡볕에도나무 그늘엔 만년설 바람 보송한소소한 풍경마저 그림엽서가 되는시퍼런 여름빛에 홀렸다 작은 포구에 영근 여름은 바라만 보아도 설레었는데돛단배 타고 하늘을 날던그 두근거림은 어디로 갔을까 누릇한 생의 가을 항(港)에서그리울 일도기다릴 이도막배에 태워 보내놓고선꽃이라 불리던 여름날 애련해뱃고동 소리 기다려진다 활짝 핀 여름 안에서그 설렘으로 가는 배표를 예매 중이다.   -림(20230626) https://www.youtube.com/watch?v=Pt_zuexXFdw&t=8s

달리아꽃 속엔

달리아꽃 속엔 임현숙 빨강, 노랑, 주황 푸짐한 달리아꽃 보름달만 한 얼굴은 울 엄마 다후다 이불 무늬 어린 시절 이부자리를 펴면 붉고 커다란 달리아꽃이 활짝 웃으며 어서 오라 했지 달리아꽃 품안에서 꿈꾸던 날은 멀리 갔어도 엄마 내음은 꽃잎마다 철철 젖어 저물녘 이 마음 두근거리네. -림(20131004) 보름달만 한 다알라아꽃을 보면 엄마 이불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이부자리를 펴면 푸짐하고 붉은 다알리아꽃이 활짝 웃고 있었다 촌스럽게 원색적이던 다후다 이불 세월이 흘러 이부자리도 고급스럽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변해 엄마의 이불은 시골 민박집에서도 보기 어려워졌다 길을 걷다 다알리아꽃을 보면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다가가 엄마 내음을 맡고 싶다

벗어나기

벗어나기 임현숙 내 머릿속 사고의 골목에 해결사 거미가 산다 얼기설기 둘러친 그물에 생각의 고리들이 포도알처럼 맺혀있다 거미는 포식하고 배불뚝이가 되어 골목 입구를 막고 잠들어 버렸다 더는 풀지 못하는 방정식이 되어가는 문제 문제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투사처럼 제발 풀어 달라고 아니 먹어달라고 흔들어 깨워도 탱탱볼 같은 배만 쓰다듬는다 풀이 기한이 지나버려 스스로 풀 수 없는 미적분 아득한 밤 미로를 헤맨다 찐득한 코피가 흐른다 거미줄이 끊어져 흘러나오는 강박의 잔해들 파랑새를 풀어놓아야겠다. -림(20230514)

2023.0512/밴중앙 게재/세월 강가에서

[밴쿠버문학] 세월 강가에서 > LIFE | 밴쿠버 중앙일보 (joinsmediacanada.com) [밴쿠버문학] 세월 강가에서 - 밴쿠버 중앙일보 임 현 숙(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장 갈대숲을 지나는 바람처럼흘러가는 세월 강물벌거숭이 시절이 까마득한 바다로 가고연분홍빛 꿈은 물거품이 되었네 꽃이 피고 지고낙엽 구르고 눈 내 joinsmediacanada.com

월간문학/2023년 5월호 수록-용서라는 말의 온도

용서라는 말의 온도 임 현 숙 당신에게로 가는 길 위에서 나는 불꽃으로 돌진하는 불나방이었습니다 오롯이 한 빛만 향해 파닥였지만 회전 벨트처럼 늘 제자리였던 길 때론 외로웠고 때론 슬픔으로 몸부림치며 스스로 상처 입던 길 사랑은 무지개색이라 말하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이글거리던 불꽃에 날개는 얼어버리고 비로소 그 길에서 내릴 수 있었습니다 더는 그립지 않아도 되는 일 더는 아프지 않아도 되는 일 이제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일 한 때 사랑이라 이름하던 그 길에 '용서해'라는 팻말을 박아 놓고 돌아오는 사람 그 말의 소름에 뜨거웠던 기억의 고리마저 고드름꽃이 피어납니다.

냄비를 닦으며

냄비를 닦으며 임현숙 냄비의 찌꺼기를 닦는다 손등이 도드라지도록 문지르니 반들반들 은빛 화색이 돈다 내 생각의 부스러기도 냄비처럼 닦고 싶다 책을 펴들어 현인의 지혜로 쓸어내고 복음으로 베어 보지만 칼칼한 게 개운하지 않다 가을이 무르익은 시집을 연다 '묵은 벽지가 바람처럼 들판을 간다' 한 절의 시구가 까칠한 화장기를 벗겨 낸다 향이 깊은 시는 마음을 닦는 비누이다 나도 누군가 누군가의 마음을 닦아 주는 시가 되고 싶다. -림(20140821)

꽃바람 깃들어

꽃바람 깃들어 임현숙 오월은 그 무엇이라도 벚꽃 같은 바람 깃드는 시절 날 찾아온 꽃바람 부끄러이 꿀꺽 삼키면 민들레처럼 번져오는 다정한 얼굴들 꽃이 핀다 사람이 핀다 내 그리운 어머니 목단꽃으로 살아나고 기억의 꽃송이 물오르고 다섯 살 손녀는 즐거운 참새 아련히 밀려오는 푸른 꽃향기에 할미꽃도 살짝궁 고개를 든다 애잔하구나 안아볼 수 없는 것들이여 사랑스러워라 오월의 사람이여 꽃바람 깃들면 하늘 저편도 하늘 이편도 모두가 푸른 꽃송이다. -림(20230501) 2023.05.13 밴조선 게재

세월 강가에서

세월 강가에서 임 현 숙 갈대숲을 지나는 바람처럼 흘러가는 세월 강물 벌거숭이 시절이 까마득한 바다로 가고 연분홍빛 꿈은 물거품이 되었네 꽃이 피고 지고 낙엽 구르고 눈 내리는 세월 강 굽이굽이 연어처럼 용솟음쳐 보지만 거스를 수 없는 잔인한 강물이여 이순 굽이 세월 강은 그리움 섧게 서린 늪 그 너머 물보라 이는 세월 강 하구에 다시금 물들 수 없는 빛깔 설렘의 쌍무지개 뜨고 어슴푸레한 기억에 기대어 철없이 벙글어지는 동백꽃 송이. -림(2023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