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독서 / 김왕노 오래된 독서 - 김왕노 서로의 상처를 더듬거나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누구에게나 오래된 독서네. 일터에서 돌아와 곤히 잠든 남편의 가슴에 맺힌 땀을 늙은 아내가 야윈 손으로 가만히 닦아 주는 것도 햇살 속에 앉아 먼저 간 할아버지를 기다려 보는 할머니의 그 잔주름 주름을 조..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9.17
가을바다에 오지마라 - 정윤천 가을바다에 오지마라 - 정윤천 가슴에 재가 남은 사람은 초가을 바다에 오지마라 가을바다에서는 흙피리 소리가 난다 댓이파리 쓸리는 걸음 무늬를 낮아져 가는 물 위에 새겨 두고 여름의 끝바람 몇 떨기가 사람들의 마을에서 멀어져 갈 때 쓰라린 목메임을 아직 다스리지 못한 사람은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9.13
헌 신 - 복효근 헌 신 -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9.05
또 한 번의 생일에 또 한 번의 생일에 임현숙 가을 문 앞에서 어머니는 낙엽을 낳으셨지 바스러질까 고이시며 젖이 없어 홍시를 먹이던 어미의 맘 반백이 넘어서야 알았네 소금 반찬에 성근 보리밥 밀 풀 죽도 먹어보았지 또 한 번의 생일에 맛보는 이밥에 기름진 반찬도 엄마 생각에 쌉싸름하네 이제 생일의 의미는 소풍 길의 종착역이 가까워지는 것 영혼의 포장지는 낡아가는데 아직도 마음은 신록의 숲이어서 가을빛 사랑을 꿈꾸기도 하지 내 생에 가장 빛나던 순간 함께하던 모든 것들이 어른거리네 유리창을 쪼갤 듯 쏟아지는 햇살이 환희로 숨 가쁘게 하는 구월 둘째 날 어딘가의 추억 속에 유월의 장미로 살아있다면 가파른 소풍 길이 쓸쓸하진 않겠네.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6.09.02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 김종해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 김종해 사라져가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안녕히라고 인사하고 떠나는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그가 돌아가는 하늘이 회중전등처럼 내 발밑을 비춘다 내가 밟고 있는 세상은 작아서 아름답다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31
시드는 꽃을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가 / 도종환 시드는 꽃을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가 / 도종환 시드는 꽃을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가 흐르는 강물을 어떻게 붙잡아둘 수 있는가 지는 저녁 해를 어떻게 거기 붙잡아 매둘 수 있는가 가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주위에는 많다 날아가는 새를 날아가던 모습으로 간직..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6.08.30
가장 잔인하고 슬픈 말 가장 잔인하고 슬픈 말 임 현 숙 내 입술 안에서 가장 슬픈 문장이 칼을 갈고 있습니다 언제든 튀어나와 당신 심장을 깊숙이 찌르고 말 것입니다 조금만이라는 시간은 달콤한 고문이어서 입술 앙다물고 버텨왔는데 길고 긴 푸른 기다림은 신기루였습니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 말하고 싶겠..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6.08.30
조용한 일 - 김사인 조용한 일 -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앉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6.08.29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 이병률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 이병률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28
만남 - 이성복 만남 - 이성복 내 마음은 골짜기 깊어 그늘져 어두운 골짜기마다 새들과 짐승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 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들어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27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류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류근(1966~, 경북 문경)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에 흘러내리는 못다 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26
그리운 우체국 - 류근 그리운 우체국 - 류근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26
파문 - 권혁웅 파문 - 권혁웅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25
어떤 사랑 이야기 - 강인한 어떤 사랑 이야기 - 강인한 스무살 무렵 내 사랑은 설레는 금빛 노을이었다 비가 내리고 눈이 쌓이고 서른살 무렵 내 사랑은 희미한 꿈결 속을 서걱이는 가랑잎이었다 속절 없는 바람이 불고 바람 위에 매운 바람이 불고 이제 사랑은 삶보다 어렵고 한갓 쓸쓸할 뿐 어느 쓰라린 어둠 속 한..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21
책 - 박기섭 책 - 박기섭 아버지, 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 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 그 밖의 많은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지, 라는 책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 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19
한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김재진 Ⅰ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그때 그 용서할 수 없던 일들 용서할 수 있으리. 자존심만 내세우다 돌아서고 말던 미숙한 첫사랑도 이해할 수 있으리. 모란이 지고 나면 장미가 피듯 삶에는 저마다 제 철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찬물처럼 들이키리.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나..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13
접시꽃 당신 - 도종환 접시꽃 당신 - 도종환 ​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6.08.10
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빨을 뽑아 지..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2016.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