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2025/01 20

등잔/도종환

등잔 / 도종환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심지만 뽑아 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그을음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 하랴욕심으로 나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방 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넉넉하기 때문이다넘치면 나를 태우고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욕심부리지 않으면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 권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설날 풍경 한 점

설날 풍경 한 점 임현숙  그 해 설날 오후보란 듯이 차린 상을 물리고 나면진초록 들판에 열두 달이 엎치락뒤치락다섯 마리 새가 날고 폭탄이 터졌다사돈간에 화투패 들고 앉아 허허허남의 설사를 좋다고 긁어가고피박, 광박 징한 용어들을 뱉어가며 눈치 싸움을 즐겼다 격도 체면도 뱀 허물처럼 벗어버린사돈끼리의 우애로운 자리였는데이국땅에서 그들 없는 설날을 만나니상 차리느라 해쓱하던 시간이 보물처럼 비쳐온다 잔소리쟁이 작은 언니 막내 요리는 눈도 즐겁다던 큰오빠 그림처럼 앉아 받기만 하던 손위 시누이도 기억 속에서 고대로인데 언젠가 다시 만날 명절에는 하나둘 먼 길 떠나  빈자리엔 귀에 익은 목소리만 희미하겠다  명치에 박제된 그날의 군상 돌아가고 싶은 우리 자리.  -림(20250122) https://www.y..

부앙부앙 울었다

부앙부앙 울었다 임현숙               부앙 울리는 저음의 색소폰 소리칠순의 멋쟁이 오빠는황혼의 회한을 불어대고 있었다힘겨운 날숨은 지난날의 보람이요꺼지지 않은 불꽃의 여생인 것을아우들이 알아주길 바랐을까삐걱대는 음에 키득거리던 못난 아우들을발그레 웃으며 바라보던큰 오라버니는다시 들을 수 없는 울림을 남기고은하 별이 되었다내 어릴 적에 예쁜 막내라고친구 모임에 손잡고 다니셨는데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도 못 해부앙부앙 울었다.  -림(20111128)   https://www.youtube.com/watch?v=dZrT2o9TfOQ

내 안에 우는 돌이 있다/문정희

내 안에 우는 돌이 있다 문정희  내 안에 우는 돌이 있다절벽에서 절벽으로 뛰어다니는소나기가 있다 휴대전화를 꺼내어 찍고 싶은데눈 뜨면 안 보이는울부짖음이다 점토의 빛깔로 다가오는 저녁내 안에 우는 돌에다 물을 준다돌의 키는 자라무엇이 될 수 있을까허공에서 허공으로 뛰어다니는새가 될 수 있을까 내 안에 우는 돌이 있다 휴대전화를 꺼내어 찍고 싶은데싱싱한 비명은 찍을 수 없다         — 시집 『그 끝은 몰라도 돼』 2025.1

그런 날에는

그런 날에는 임 현 숙  개미 발소리가 들리는 날*까똑 소리가 기다려지는 날딸의 귀가를 재촉하는 날잘 정리된 서랍을 다시 뒤적이는 날그런 날엔 애꿎은 추억을 벌씌운다 *까똑까똑 말 거는 것이 귀찮은 날말벗이 되어주는 딸아이가 성가신 날넋 놓고 있고 싶은 날그런 날엔 내게 타이른다산다는 건 낡은 추억을 깁는 게 아니라싱싱한 추억거리를 짓는 거라고.  -림(20210609)*카카오톡 알림 소리  https://www.youtube.com/watch?v=jUgmEOcxsBw

겨울비에 베이다

겨울비에 베이다  임현숙  하늘도 땅도 물바다댓살 같은 겨울비 어느 휠체어 바퀴에 처덕거리다가내 무릎에 와 가시로 박힌다 기울은 세월의 미운 짓가슴 저며오는 한기 언제였던가 겨울비가 마음 데우던 시절우산 안에서 더 가까워지던 우리비보라 칠수록 더운 김 오르고 첨벙거리며 달려도 짱짱하던 무르팍이여 그날처럼 우산을 펴 들었지만빗방울 둥근 칼날 가슴에 붉은 길을 낸다 빗소리는 미안하다 하고성난 무릎따스한 기억에 기대어구들목 찾아 터덜거리는데 건널목이 십 리 길인 듯 푸른 신호 깜박깜박빗줄기 쫓아오며 신들린 칼춤을 추어대고.  -림(20241215) https://www.youtube.com/watch?v=t6FjZUKG54M

새해를 맞으며

새해를 맞으며 임 현 숙   묵은 달력을 내려놓습니다내 마음처럼 무게가 천근이어요장마다 빼곡한 사연들을 되새겨보니복덩어리가 수북합니다가진 게 없다고 빈손이라고 하늘에 떼쓰던 두 손이 부끄러워집니다 가붓한 새 달력을 그 자리에 둡니다내 마음도 새 달력 같습니다오늘또 오늘 쌓일 복 더미 생각에손등에 푸른 핏줄이 더 불거집니다. -림(20201223) https://www.youtube.com/watch?v=nPHjwWkV5U8

새날의 일기

새날의 일기 임현숙  어제는등 뒤로 저문 것들이 더부룩해되새김질하곤 했기에오늘 만나는 새날 앞에맑은국 한 사발 정화수처럼 내어놓습니다 제야의 종소리 한울림마다 빌고 빌었지만이루어질 수 없는 숱한 바람들은그 문장조차 희미해지고빈손엔 미련만이 돌아앉아 있습니다 생의 여름은 저물어이별에 익숙해져야 할가을 빈 벌판에서허옇게 서리 내린 머리 조아리며작은 바람 뭉치 하나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새날에는뒤돌아보지 않게 하소서마음의 텃밭에 미운 가라지가 싹 트지 않게 하소서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게 하소서제야의 종소리를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그것으로 족하다 미소 짓게 하소서 낡은 나무 계단처럼 삐그덕거리는 사연을제야의 종소리에 둥 두웅 실어 보내며첫사랑 같은 새날을맨발로 마중합니다. -림(2024 새해를 맞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