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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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를 찾습니다

노루를 찾습니다 나목 임현숙 긴 귀를 쫑긋거리며 큰길 앞에 서 있는 노루 가족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어미가 앞장서 길을 건넌다 노루는 울부짖기보다 귀를 잘 기울인다 뉘엿뉘엿 해넘이 길에 귀 막은 동물들의 입씨름 고여있는 생각 때문일까 외로움 탓일까나 제발 귀를 좀 열어주세요~ 노루는 어디에 있을까 왠지 섧다. -림(20220326)

백조의 꿈

백조의 꿈 나목 임현숙 꽃 각시 시절 우아한 백조를 보았다 희끗희끗한 올림머리 치자꽃 내음 머금은 지금의 내 나이 또래 그녀 오래도록 거울 앞에서 그려보곤 했다 훗날 그녀처럼 되어야지 그 나이 오늘 거울 안엔 눈빛도 살빛도 닮지 않은 황조롱이 무거운 날개 닦고 있다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일선에 선 슬픈 눈빛 메기수염 입가 주름은 천일 또 또 천일의 이력 아 거울 안 백조의 꿈은 저만치 날아갔건만 거울 밖 황조롱이 가슴엔 노을빛 부서지는 다뉴브강이 물결친다. -림(20220323)

저어기 아롱거리는

저어기 아롱거리는 나목 임현숙 봄, 이 봄은 상냥하기도 하지 고목에도 새 이파리 돋아나네 꽃바람 미끄러지며 연두 꽃망울 너울대고 아지랑이처럼 추억이 피네 낡아 깁고 덧댄 기억들 나그네 긴 여정에 낙타의 두 혹 같은 것 새봄이 찾아와도 두근거리지 않을 화석으로 남아 풀잎 꽃 낙엽 눈··· 사철 피어나는 돌꽃이어라 그래 오랜 추억은 기억일 뿐 이 봄엔 푸른 향기를 그리워하자 기억 저어편 그것 말고 저어기 아롱거리는 신기루 같은. -림(20220310)

겨울을 보내며

겨울을 보내며 나목 임현숙 바다를 건너온 봄이 겨울잠이 목마른 내 빈한 뜨락에 바다 빛 수다를 풀어놓는다 지난겨울은 순결한 눈빛으로 기도를 가르쳤다 빈 들에서 주린 이를 위하여 눈밭에서 헐벗은 이를 위하여 겨울비처럼 눈물짓는 이를 위하여 다시 드러날 나의 허물을 위하여 지난겨울은 마음 수련원이었다 무언의 회초리로 내 안에 파도치는 노여움과 모난 등성이를 꾸짖어 참 어른다운 자리로 이끌었다 봄이면 철부지로 되돌아갈 일 겨울마다 받은 수십 개의 수료증이 마음 벽을 도배한다 이제 돌아갈 때라는 듯 봄의 헛기침이 뒷산의 잔설을 불어 내자 잰걸음으로 떠나는 겨울 미련 없이 꽃바람 품에 안기며 겨울의 언어로 배웅한다 다음에도 지엄한 회초리를 기다리겠다고. -림(20220222)

오래되면

오래되면 나목 임현숙 늙수그레한 용달차 팔팔해 보여도 매일 점검을 해야 해 더 오래된 차는 아직 젊어 좋겠다고 말하지 그래 서른 살 된 차가 보기엔 스무 살은 청년이지 스무 살의 절반은 짐이 깨끗하고 단출해서 날아다녔지 단 한 번의 추돌 사고 후 내 등에 실린 건 쇠붙이였다네 발이 땅에 붙게 버거워 헉헉거리다가도 이 짐이 누군가의 밥이 되고 날개가 된다는 것이 새 원동력이 되었어 언덕을 오를 때면 거북이가 되지만 조금 느리면 어때 심장이 멈출 때까지 달려갈 테야 낡고 긴 터널을 지나며 빛을 향해 뛰어가고 싶은 그 여자 아침마다 오래된 혈관에 윤활유를 붓는다. -림(20220215) 한국문협 부산지부/월간 문학도시2022년 8월호/기획특집/해외 한국문학 수록

겨울비에게

겨울비에게 나목 임 현 숙 겨울비는 줄곧 내리고 창가 의자와 한 몸 되어 무생물이 되어간다 흐린 눈빛이 거리를 내다보면 힘차게 달리는 자동차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장대비 내려 빈 눈빛에 강물이 찰랑대게 해 주렴 번개야 휴화산 심장에 도화선이 돼주렴 천둥아 깊이 잠든 이성을 벌떡 깨워주렴 눈 감으면 떠오르던 먼 그리움 말라버린 눈물조차도 새살처럼 돋아나기를 겨울비여 나는 살아 있고 싶다. -림(20220204)

회상

회상 나목 임 현 숙 눈 오는 밤 거침없이 내리는 저 눈발은 오랜 기억의 편린들 밤이 깊을수록 눈발은 이 가슴 후비고 머언 곳으로부터 날아오는 모스부호 나는 잊었다 했는데 가슴에 묻었다 했는데 슬그머니 나부끼는 청춘의 분홍 깃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새로 태어날 수 있다면 분홍 대신 나만의 파랑길을 걸으리. -림(20211220)

아픔보다 더한 아픔

아픔보다 더한 아픔 나목 임 현 숙 목에 쇠침이 박혔다 설마 했던 그놈이 내게도 들어왔다 대문에 빗장 건 이레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 마른 갈대 입술을 열면 작렬하는 쇳소리 한솥밥 식구들은 겉보기엔 나이롱환자 망할 균이 흥해서 우쭐대는 중이지만 1차 2차 3차 저항군이 절대 백기는 들지 않을 것 분연히 항거하는 더운 숨소리 아프다 너와 내가 곁눈으로 눈치 보며 저 건너에서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이. -림(20220116)

연말정산

연말정산 나목 임 현 숙 먼 옛날엔 연말이 다가오면 대중목욕탕에서 때 정산을 하곤 했다 그 시절 어머니 손길 그리워 먼 하늘 바라보다 오늘 때밀이 대신 마사지를 받는다 수줍은 첫 경험 미지의 문을 열고 들어서서 나보다 작은 여자의 안내를 받고 탈의 후 엎드려 누워 심호흡하면 깊숙이 밀려오는 라벤더 향기 어제의 모자란 잠이 파도친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들이 피아노를 연주하듯 굴러갈 때마다 뻐근하다고 엄살 부리던 근육이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른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세포들에 주는 선물 석화된 마음마저도 마시멜로가 되어 미운 사람을 안아주고 싶어진다 사랑할까 두려운 연말정산이다. -림(20211221)

김치와 손녀

김치와 손녀 나목 임 현 숙 만 네 살인 손녀 가르치지 않아도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솜씨가 놀랍다 나랑 한국말로 조잘거리다가 순간 지 아빠와 영어로 재잘거린다 자동 반사하는 그 이쁜 입술이 가끔 날 삐지게도 한다 '할머니 손에서 냄새 나' '어휴 김치 냄새' 손을 깨끗이 씻어도 때로 음식 냄새가 배어있기 마련 냄새 묻은 손으로 주는 음식은 밀어낸다 수십 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김치 인이 박인 마약을 손녀와 더 알콩달콩 지내려면 멀리해야 할까. -림(20211210)

가을 기도

가을 기도 임 현 숙 수수하던 이파리 저마다 진한 화장을 하는 이 계절에 나도 한 잎 단풍이 되고 싶다 앙가슴 묵은 체증 삐뚤거리던 발자국 세 치 혀의 오만한 수다 질기고 구린 것들을 붉게 타는 단풍 숲에 태우고 싶다 그리하여 찬란한 옷을 훌훌 벗고 겸손해진 겨울 숲처럼 고요히 고요히 사색에 들어 입은 재갈을 물고 토하는 목소리에 귀담아 오롯이 겸허해지고 싶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아 부름에 선뜻 대답할 수 있기를 겨울이 묵묵히 봄을 준비해 봄이 싱그럽게 재잘거리는 것처럼 나도 무언가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림(20211022)

그런 날

그런 날 임 현 숙 개미 발소리가 들리는 날 *까똑 소리가 기다려지는 날 딸아이의 귀가를 재촉하는 날 잘 정리된 서랍을 다시 뒤적이는 날 그런 날엔 애꿎은 추억을 벌씌운다 *까똑까똑 말 거는 것이 귀찮은 날 말벗이 되어주는 딸아이가 성가신 날 넋 놓고 있고 싶은 날 그런 날엔 내게 타이른다 산다는 건 낡은 추억을 깁는 게 아니라 싱싱한 추억거리를 짓는 거라고. -림(20210609) *카카오톡 알림 소리

여섯 개의 눈

여섯 개의 눈 임 현 숙 다초점 안경 여섯 개의 눈으로 위로는 멀리 아래론 가까이 숨기고 싶은 주름살 잡티 어제보다 선명하다 뭉뚱그려 보이던 깨알 설명서도 가갸 거겨 확실히 책 속에서 '너'라고 읽은 글자는 '나' '네 탓'이라고 보던 글자는 '내 탓' 눈이 밝아 마음도 맑다 한결 맑아지려 유리 눈을 닦으면 앙큼한 발상이 은근슬쩍 철옹성 네 심상을 들여다보려 눈동자 너머로 까치발 한다. -림(20210526)

봄비 오시네

봄비 오시네 임 현 숙 봄비 오시네 사납게 파고들던 겨울비 저만치 보드라이 흐르는 봄비의 손결 회색빛 마을 화사해지리 다정한 빗살에 파랗게 일어서는 풀 내음 거칠었던 숨 다스리며 나도 한껏 푸르러지리 봄비는 저물녘 마음 강가 도란도란 흐르는 너의 목소리 겨울 그림자 길어진 날엔 새파란 봄비여 어서 오소서. -림(20210506)

'열린문학회'에서

'열린문학회'에서 임 현 숙 빗방울 소리 배경 음악으로 시인은 마음의 노래를 부르고 수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쏟아붓는 비처럼 서정의 단비 내리는 이날 추운 사람도 고픈 사람도 그저 좋아라 덩실거린다 빨강 파랑 노랑 서로 다른 빛깔의 우리지만 이 시간만큼은 초록물이 흠뻑 들었다 좋은 글을 읽고 듣노라면 초록 초록 마음이 자라난다. -림(20210927) *한국문협 밴쿠버지부의 '제6회 열린문학회'가 비 오는 날 공원에서 열렸다.

어느 밤

어느 밤 임 현 숙 긴 하품은 꿈길로 가자 하는데 아래층 티브이는 쿵쿵 큰북을 쳐대고 벽 너머에선 음표들이 웅얼웅얼 자동차마저 괴성을 지르며 지나가니 마그마가 목덜미를 타고 오른다 화산 폭발 일 분 전 진공청소기로 저 부랑아들을 싸악 흡입하고 싶다 밤은 열심히 새벽으로 달려가고 빈 위장이 해맑게 칭얼거리는 아 화산재 날리는 밤. -림(20210810)

시클라멘 화분과 나

시클라멘 화분과 나 임 현 숙 창가에 놓인 시클라멘 화분 봄볕 소나기에 목이 말랐는지 하얀 꽃 이파리 가로누웠네요 시원하게 물 샤워를 시키니 흰 꽃나비 날아갈 듯 날개를 펼쳐요 시들어가며 얼마나 애타게 나를 바라보았을까요 주인님, 타들어 가는 제 모습이 안 보이시나요 나도 하늘이 기르는 무명초여요 한 때 갈망에 몸부림쳐도 응답이 없을 적 가만히 바라만 보는 줄 알았었지요 가까스로 물을 찾아 일어서며 깨달았어요 숨 넘어가는 고비에서도 나의 주인은 바로 해갈해 주지 않고 스스로 우물을 찾도록 지혜롭게 하셨어요 시클라멘과 달리 나는 내 주인의 형상으로 지어졌잖아요. -림(202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