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있어요 임 현 숙 위이 윙 제초기가 잡초 허리를 자르자 숨어 핀 작은 꽃송이 바들바들 떤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듯 울창한 그대 마음 가지치기해보면 "나, 여기 있어요." 수줍게 고개 드는 꽃 한 송이 진정 누구일까? -림(20150824)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3.07
머리를 자르며 머리를 자르며 임 현 숙 뒤통수 살리고 길이는 짧게 주문하는 대로 가위가 지나가면 화들짝 일어서는 흰머리 세월의 무게로 늘어진 눈꼬리 탄력 없는 볼이며 메마른 입술 거울 속 얼굴이 참 낯설다 하양 교복 카라 명랑한 입술 검은 머리 소녀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을 어푸거리며 하구까..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8.03.06
그 시간마저도 그립습니다 그 시간마저도 그립습니다 임 현 숙 멀리 고향을 떠나와 나처럼 외로운 건지 길섶에 옹기종기 살을 비비고 있는 조약돌들 비 내리는 날이면 빗물 따라가려 졸졸졸 거리지만 제자리에서 어깨만 들썩일 뿐 동해의 푸른 숨결 서해의 붉은 낙조 울안에 덩굴지던 능소화 마음 자락 별빛 헤며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3.02
입맛 다시다 입맛 다시다 임 현 숙 설날이라고 떡국을 먹는다 소고기를 숭덩숭덩 썰어 대충 끓였는데도 구수한 국물과 졸깃한 떡가래가 자꾸 숟가락을 끌어당긴다 뱃속은 그만이라고 신호를 보내오건만 쯧쯧 해가 가도 줄지 않는 이 식탐 짧은 이월은 모자라서 더욱 간절한 하루 아니던가 오래도록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2.25
그곳에 가면 그곳에 가면 임 현 숙 느른하고 헐렁한 오늘 갓 잡은 고등어처럼 펄펄 뛰는 남대문 시장에 가고 싶다 골라 골라 손뼉을 치며 온종일 골라보라는 사람 오만 잡동사니를 단돈 몇 푼에 한 보따리 준다는 사람 천 원 한 장으로 허기를 지울 수 있던 빈대떡집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커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2.14
그래도(島) 그래도(島) 임 현 숙 내 바다엔 '그래도(島)'라는 섬이 있다 '긍정'이라는 꽃과 '감사'라는 열매가 영그는 푸른 나무가 자란다 섬 한쪽 모퉁이 하지만(灣)'이라는 포구엔 통통배가 자주 드나들며 뿔난 생각을 부려놓는다 지쳤어, 고달파, 슬퍼…… '하지만(灣)'의 파도가 철썩철썩 다듬어 푸..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2.06
두물머리 미루나무 두물머리 미루나무 임 현 숙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사백여 년을 살아온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남 총각 북 처녀의 눈물이 만나 얼싸안는 것을 지켜보았고 세상 소풍을 끝낸 영혼의 껍데기가 먼지처럼 강물에 흩날리는 것도 연인들의 진한 사랑의 몸짓도 나뭇가지 사이..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2.04
새 달력에 바란다 새 달력에 바란다 임 현 숙 폭죽 소리 달려와 새날을 열며 내게로 네게로 복을 쏟아붓는다 등 따습고 배부르니 더 바라는 건 죄이지만 새 달력에 간절한 바람을 담는다 이방인의 멍에 벗고 가로등 소곤대는 서울 밤거리를 거침없이 모국어로 떠들며 걷고 싶다고 느림보 밴쿠버 시계 뺑뺑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1.29
별이 되었을 그녀 별이 되었을 그녀 임 현 숙 누군가의 부음을 들으면 먹먹해지며 오늘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 느닷없는 그녀의 죽음 앞에 연민이 목울대를 넘어온다 시인인 그녀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달빛이 되고 바람이 되어 허공의 별이 된다'고 했다 오늘은 바람이 활개를 친다 창..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1.23
겨울 여자 겨울 여자 임 현 숙 사알짝 푼수인 그녀는 구불구불한 인생길을 가며 봄의 길목에선 눈웃음치는 진달래꽃으로 여름을 나는 울타리에선 선홍빛 장미로 꽃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났지요 간절한 사랑꽃 마지막 장미로 피고 이제 까치밥처럼 마른 씨만 남은 겨울에 삽니다 빈 마음 밭에 피는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1.21
처음처럼 처음처럼 임 현 숙 처음엔 그랬다 당신으로 행복합니다 마음까지도 내 것인 양 착각마저도 언젠가 당신이 그랬지 마음엔 족쇄를 채우지 말라고 가슴앓이와 무덤덤한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흘러 귀밑머리 치어다 보며 드는 기~인 생각 녹슨 빗장 툭 부수고 퇴화한 날개 파닥파닥 훠 얼 훨..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1.13
이 아침에 이 아침에 임 현 숙 말하지 않아도 내 모든 걸 아시는 임이여 이 아침 향기로운 커피가 목에 걸리는 이유 이미 아실 테지요 견뎌낼 만큼만 시련을 주십시오 나는 사기그릇처럼 유약합니다 벌써 이 빠지고 금이 가 담긴 은혜 줄줄 새어나가고 불평의 거미가 날 먹으려 그물을 놓았나이다 .. 나목의 글밭/기도·하늘 바라기 2018.01.12
우리 우리 임 현 숙 처음엔 그랬다 당신으로 행복합니다 마음까지도 내 것인 양 착각마저도 마음의 빗장은 쉬이 열린다는 걸 왜 몰랐을까 가슴앓이와 무덤덤한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흘러 귀밑머리 치어다 보며 드는 깊은 사념 퇴화한 날개 파닥파닥 훠 얼 훨 날고 싶어요 생각이 부딪힐 때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8.01.10
그리움은 갈수록 잔인해지고 그리움은 갈수록 잔인해지고 임 현 숙 기다림으로 수척해진 마음을 그리움이 잔인하게 살을 바릅니다 기찻길이 보이는 곳에 아버지와 나란히 누워 막내딸을 기다릴 엄마가 옆구리 살을 엡니다 장손자가 어련히 돌보고 있으련만 지붕에 자라났던 아카시아가 다시 그늘을 드리운 건 아닌..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1.10
베개 베개 임 현 숙 어둠이 내리고 물 젖은 솜이 되어 불을 끄면 푸근히 안아주는 베개 달콤한 속삭임 서러운 눈물 무거운 생각마저 쓰윽 스며들어 툭툭 털면 은밀한 이야기 먼지처럼 쏟아져 내리는 진솔한 삶의 이력서 때때로 겉옷만 갈아 입히면 다시 젊어지는 침실의 애인. -림(20130516)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1.08
딸기 딸기 임 현 숙 어쩌다 꿈결처럼 다녀가는 그대 내 얼굴 보고 돌아서지 마세요 올록볼록 뾰루지에 빨간 사랑 듬뿍 담겨있어요 새콤함 뒤에 달콤한 맛 빠알간 소녀 같은… 그게 바로 제 마음이라니까요. -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1.07
글을 써야 사는 여자 글을 써야 사는 여자 임 현 숙 세상 물정 모르고 종달새처럼 살던 나날이 꿈이었다면 삐딱한 삶의 길에서 바로 서기 위한 몸부림이 마음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대못이 쾅쾅 박여 숨이 멎을 것 같은 나날을 글 한 줄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애써 웃음 지어 봅니다 낮은음자리 마음의 노래가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8.01.05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임 현 숙 어서 오십시오 나목 사이로 솟아오르는 새날이여 고난의 장벽을 뛰어넘어 텅 빈 곳간에 금빛 햇살이 넘실거리게 하소서 저 북방 거센 바람으로 나이테 늘어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의 티끌을 키질하소서 웃음을 잃은 이에게 소망 박을 타게 하시고 사랑을 잃은 이의 눈물을 거두어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겸손의 신발을 신고 배려를 지팡이 삼아 무장무장 섬김의 길을 가게 하시고 내 모습 이대로 감사하며 날마다 행복의 샘물을 나누게 하소서 어서 오십시오 나목에 파릇한 옷을 지어줄 새날이여. -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7.12.31
안녕,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여 안녕,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여 임 현 숙 풍랑 일던 한 해야 잘 가거라 널 맞던 첫날 그려보던 바람은 인제도 미완성이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따스한 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부실한 몸이나마 앓아눕지 않고 보고 듣고 느끼며 좋은 사람들과 일 할 수 있었으니 무엇을 더 탐하겠느냐 세상에..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7.12.30
안녕,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여 안녕,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여 임 현 숙 풍랑 일던 한 해야 잘 가거라 널 맞던 첫날 그려보던 바람은 인제도 미완성이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따스한 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부실한 몸이나마 앓아눕지 않고 보고 듣고 느끼며 좋은 사람들과 일 할 수 있었으니 무엇을 더 탐하겠느냐 세상에..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7.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