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시2·다시 부르는 노래 118

하얀 샌들

하얀 샌들 임 현 숙 나는 그녀의 하얀 샌들 여름이면 엄지발톱을 빨갛게 물들인 그녀와 종종 나들이를 갔다 어느 날엔 맛있는 냄새가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아줌마들의 찰진 수다가 메탈 음악처럼 귀를 뚫곤 했다 붉은 발톱은 여유로웠고 나는 더위 안에서 추위를 타곤 했다 하얀 살갗이 누레지고 주름지도록 그녀의 작은 발을 사랑하며 또각또각 동행했는데 명랑하던 그녀가 폭폭 울던 그날 이후 신발장 귀퉁이에서 몇 번의 여름을 깜깜하게 보내고 있다 그녀의 슬픈 발에는 키 작은 운동화가 날마다 따라다니고 절인 배추가 되어 돌아온 운동화에선 고달픈 하루 냄새가 배어 나온다 신발장 문이 열릴 때마다 나 여기 있다고 들썩여 봤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그 납작한 운동화만 데리고 간다 땡고추 같은 쌀쌀함이 측은하기만 ..

가을 항(港)의 여름은

가을 항(港)의 여름은 임현숙  풍요로운 햇살 덕에하늘빛도채마밭도새파랗고고향을 떠나 뿌리내린 나도허릿살이 풍성해진다 생의 늦여름에 만났던낯선 땅 밴쿠버땡볕에도나무 그늘엔 만년설 바람 보송한소소한 풍경마저 그림엽서가 되는시퍼런 여름빛에 홀렸다 작은 포구에 영근 여름은 바라만 보아도 설레었는데돛단배 타고 하늘을 날던그 두근거림은 어디로 갔을까 누릇한 생의 가을 항(港)에서그리울 일도기다릴 이도막배에 태워 보내놓고선꽃이라 불리던 여름날 애련해뱃고동 소리 기다려진다 활짝 핀 여름 안에서그 설렘으로 가는 배표를 예매 중이다.   -림(20230626) https://www.youtube.com/watch?v=Pt_zuexXFdw&t=8s

달리아꽃 속엔

달리아꽃 속엔 임현숙 빨강, 노랑, 주황 푸짐한 달리아꽃 보름달만 한 얼굴은 울 엄마 다후다 이불 무늬 어린 시절 이부자리를 펴면 붉고 커다란 달리아꽃이 활짝 웃으며 어서 오라 했지 달리아꽃 품안에서 꿈꾸던 날은 멀리 갔어도 엄마 내음은 꽃잎마다 철철 젖어 저물녘 이 마음 두근거리네. -림(20131004) 보름달만 한 다알라아꽃을 보면 엄마 이불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이부자리를 펴면 푸짐하고 붉은 다알리아꽃이 활짝 웃고 있었다 촌스럽게 원색적이던 다후다 이불 세월이 흘러 이부자리도 고급스럽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변해 엄마의 이불은 시골 민박집에서도 보기 어려워졌다 길을 걷다 다알리아꽃을 보면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다가가 엄마 내음을 맡고 싶다

벗어나기

벗어나기 임현숙 내 머릿속 사고의 골목에 해결사 거미가 산다 얼기설기 둘러친 그물에 생각의 고리들이 포도알처럼 맺혀있다 거미는 포식하고 배불뚝이가 되어 골목 입구를 막고 잠들어 버렸다 더는 풀지 못하는 방정식이 되어가는 문제 문제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투사처럼 제발 풀어 달라고 아니 먹어달라고 흔들어 깨워도 탱탱볼 같은 배만 쓰다듬는다 풀이 기한이 지나버려 스스로 풀 수 없는 미적분 아득한 밤 미로를 헤맨다 찐득한 코피가 흐른다 거미줄이 끊어져 흘러나오는 강박의 잔해들 파랑새를 풀어놓아야겠다. -림(20230514)

꽃바람 깃들어

꽃바람 깃들어 임현숙 오월은 그 무엇이라도 벚꽃 같은 바람 깃드는 시절 날 찾아온 꽃바람 부끄러이 꿀꺽 삼키면 민들레처럼 번져오는 다정한 얼굴들 꽃이 핀다 사람이 핀다 내 그리운 어머니 목단꽃으로 살아나고 기억의 꽃송이 물오르고 다섯 살 손녀는 즐거운 참새 아련히 밀려오는 푸른 꽃향기에 할미꽃도 살짝궁 고개를 든다 애잔하구나 안아볼 수 없는 것들이여 사랑스러워라 오월의 사람이여 꽃바람 깃들면 하늘 저편도 하늘 이편도 모두가 푸른 꽃송이다. -림(20230501) 2023.05.13 밴조선 게재

세월 강가에서

세월 강가에서 임 현 숙 갈대숲을 지나는 바람처럼 흘러가는 세월 강물 벌거숭이 시절이 까마득한 바다로 가고 연분홍빛 꿈은 물거품이 되었네 꽃이 피고 지고 낙엽 구르고 눈 내리는 세월 강 굽이굽이 연어처럼 용솟음쳐 보지만 거스를 수 없는 잔인한 강물이여 이순 굽이 세월 강은 그리움 섧게 서린 늪 그 너머 물보라 이는 세월 강 하구에 다시금 물들 수 없는 빛깔 설렘의 쌍무지개 뜨고 어슴푸레한 기억에 기대어 철없이 벙글어지는 동백꽃 송이. -림(20230405)

용서라는 말의 온도

용서라는 말의 온도 임 현 숙 당신에게로 가는 길 위에서 나는 불꽃으로 돌진하는 불나방이었습니다 오롯이 한 빛만 향해 파닥였지만 회전 벨트처럼 늘 제자리였던 길 때론 외로웠고 때론 슬픔으로 몸부림치며 스스로 상처 입던 길 사랑은 무지개색이라 말하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이글거리던 불꽃에 날개는 얼어버리고 비로소 그 길에서 내릴 수 있었습니다 더는 그립지 않아도 되는 일 더는 아프지 않아도 되는 일 이제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일 한 때 사랑이라 이름하던 그 길에 '용서해'라는 팻말을 박아 놓고 돌아오는 사람 그 말의 소름에 뜨거웠던 기억의 고리마저 고드름꽃이 피어납니다. -림(20230202)

강변에서

강변에서 임현숙 어제는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리운 이름이 낙엽과 뒹굴며 추억의 파노라마를 그렸습니다 오늘도 바람이 붑니다 하얀 눈발 억새풀 머리에 꽃잎처럼 쌓이고 마음은 바다 건너 서편에 머무는데 내 정처없는 발길은 강 건너 남쪽 그리움의 강변을 따라 걷습니다 바다는 시퍼런 파도로 철썩이지만 저 강물은 보드라운 물결로 허기진 마음뚝을 다독입니다 더는 바닷가에서 저녁놀을 기다리지 말라고 푸른 강 저기에 뜨는 노을이 그보다 뜨겁다고 속삭입니다. -림(20230201)

내 발등 내가 찍었다

내 발등 내가 찍었다 임현숙 작은 정원을 꾸미고 있었다 단풍나무 아래에 달빛 같은 물망초도 심고 울 엄마 닮은 나팔꽃도 심고 패랭이꽃, 금낭화 오밀조밀 심고 나니 크고 화려한 꽃을 심고 싶었다 작약 나무를 고르자 주변 사람들 모두 아니라 했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병든 흔적이 보인다며 고개를 저었다 잘 키울 수 있다고 자신하며 덜컥 심었는데 꽃은커녕 숨어있던 병이 가지마다 출렁거린다 가지를 쳐내고 수혈을 해봐도 고질병인가 보다 '내 발등 내가 찍었다.' 때로는 조언을 귀담아들어야겠다. -림(20230125)

그래요

그래요 임현숙   저 위에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실 때그분만이 아는 예치금이 담긴 통장을목숨에 붙여 주셨어요찾기 싫어도 날마다 줄어드는데건강이라는 이자가 붙어 조금 불어나긴 해요  건강하게 살려면 이렇게 하라 이걸 먹어라눈으로 귀로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도맘 내키는 대로 살아왔지요 나무 한 그루도 잘 돌보지 않으면푸른 이파리 벌레 먹고 갈변하듯이먹물 같던 머리 하얀 서리꽃 밭인 지금제멋대로 살아온 대가를 치르는 중이에요소화제 한 번 안 드시던 시어머니팔십 오수를 누리다 하늘로 가셨는데내 통장 잔고는 얼마나 될까요 여름을 지나며 옷 서랍을 정리하는데입지 않고 그냥 낡고 있는 옷들 위로올해 산 옷들이 거드름 피우고 있어요섬광처럼 꾸짖는 소리 들려요 '살아온 세월보다 남은 시간이 더 짧단다.' 그래요허리 꺾인 세..

칼꽃의 바람

칼꽃의 바람 임 현 숙 전화기 너머에서 칼과 칼이 부딪치고 핏빛 칼꽃이 만발해요 동물의 말소리처럼 음성도 억양과 색깔이 다 다르죠 싫은 소리도 상냥하면 달콤하게 들리고 예사말도 거칠면 욱하게 해요 꽃잎에 베인 가슴에 핏방울이 맺히고 팡 터질 때마다 성품이 드러나지요 카나리아처럼 말하고 싶은데 입술이 길길이 칼꽃을 피우니 귀를 봉해야 할까 입술을 잠가야 할까요. -림(20220817)

민들레

민들레 임 현 숙 하늘 아래 낮게 피어 고개 떨구지 않는 풀꽃 강아지가 오줌을 깔기고 가도 노랗게 웃는 얼굴 잔디밭의 천덕꾸러기지만 꽃잎 이파리 뿌리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약초 바람 따라 날아가 부활하는 민들레꽃 누군가는 오늘도 모가지를 비틀고 그 누군가는 송두리째 파내겠지만 나는 어제 민들레 홀씨 하나 마음밭에 심었다. -림(20220423)

노루를 찾습니다

노루를 찾습니다 나목 임현숙 긴 귀를 쫑긋거리며 큰길 앞에 서 있는 노루 가족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어미가 앞장서 길을 건넌다 노루는 울부짖기보다 귀를 잘 기울인다 뉘엿뉘엿 해넘이 길에 귀 막은 동물들의 입씨름 고여있는 생각 때문일까 외로움 탓일까나 제발 귀를 좀 열어주세요~ 노루는 어디에 있을까 왠지 섧다. -림(20220326)

백조의 꿈

백조의 꿈 나목 임현숙 꽃 각시 시절 우아한 백조를 보았다 희끗희끗한 올림머리 치자꽃 내음 머금은 지금의 내 나이 또래 그녀 오래도록 거울 앞에서 그려보곤 했다 훗날 그녀처럼 되어야지 그 나이 오늘 거울 안엔 눈빛도 살빛도 닮지 않은 황조롱이 무거운 날개 닦고 있다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일선에 선 슬픈 눈빛 메기수염 입가 주름은 천일 또 또 천일의 이력 아 거울 안 백조의 꿈은 저만치 날아갔건만 거울 밖 황조롱이 가슴엔 노을빛 부서지는 다뉴브강이 물결친다. -림(20220323)

저어기 아롱거리는

저어기 아롱거리는 나목 임현숙 봄, 이 봄은 상냥하기도 하지 고목에도 새 이파리 돋아나네 꽃바람 미끄러지며 연두 꽃망울 너울대고 아지랑이처럼 추억이 피네 낡아 깁고 덧댄 기억들 나그네 긴 여정에 낙타의 두 혹 같은 것 새봄이 찾아와도 두근거리지 않을 화석으로 남아 풀잎 꽃 낙엽 눈··· 사철 피어나는 돌꽃이어라 그래 오랜 추억은 기억일 뿐 이 봄엔 푸른 향기를 그리워하자 기억 저어편 그것 말고 저어기 아롱거리는 신기루 같은. -림(20220310)

겨울을 보내며

겨울을 보내며 나목 임현숙 바다를 건너온 봄이 겨울잠이 목마른 내 빈한 뜨락에 바다 빛 수다를 풀어놓는다 지난겨울은 순결한 눈빛으로 기도를 가르쳤다 빈 들에서 주린 이를 위하여 눈밭에서 헐벗은 이를 위하여 겨울비처럼 눈물짓는 이를 위하여 다시 드러날 나의 허물을 위하여 지난겨울은 마음 수련원이었다 무언의 회초리로 내 안에 파도치는 노여움과 모난 등성이를 꾸짖어 참 어른다운 자리로 이끌었다 봄이면 철부지로 되돌아갈 일 겨울마다 받은 수십 개의 수료증이 마음 벽을 도배한다 이제 돌아갈 때라는 듯 봄의 헛기침이 뒷산의 잔설을 불어 내자 잰걸음으로 떠나는 겨울 미련 없이 꽃바람 품에 안기며 겨울의 언어로 배웅한다 다음에도 지엄한 회초리를 기다리겠다고. -림(20220222)

오래되면

오래되면 나목 임현숙 늙수그레한 용달차 팔팔해 보여도 매일 점검을 해야 해 더 오래된 차는 아직 젊어 좋겠다고 말하지 그래 서른 살 된 차가 보기엔 스무 살은 청년이지 스무 살의 절반은 짐이 깨끗하고 단출해서 날아다녔지 단 한 번의 추돌 사고 후 내 등에 실린 건 쇠붙이였다네 발이 땅에 붙게 버거워 헉헉거리다가도 이 짐이 누군가의 밥이 되고 날개가 된다는 것이 새 원동력이 되었어 언덕을 오를 때면 거북이가 되지만 조금 느리면 어때 심장이 멈출 때까지 달려갈 테야 낡고 긴 터널을 지나며 빛을 향해 뛰어가고 싶은 그 여자 아침마다 오래된 혈관에 윤활유를 붓는다. -림(20220215) 한국문협 부산지부/월간 문학도시2022년 8월호/기획특집/해외 한국문학 수록

겨울비에게

겨울비에게 나목 임 현 숙 겨울비는 줄곧 내리고 창가 의자와 한 몸 되어 무생물이 되어간다 흐린 눈빛이 거리를 내다보면 힘차게 달리는 자동차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장대비 내려 빈 눈빛에 강물이 찰랑대게 해 주렴 번개야 휴화산 심장에 도화선이 돼주렴 천둥아 깊이 잠든 이성을 벌떡 깨워주렴 눈 감으면 떠오르던 먼 그리움 말라버린 눈물조차도 새살처럼 돋아나기를 겨울비여 나는 살아 있고 싶다. -림(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