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시2·다시 부르는 노래 117

그리움의 등을 켜니

그리움의 등을 켜니 임 현 숙   초록빛 꿈을 그리던젊은 날은지문조차 닳아버린 기억 안갯속을 헤맬 때면책갈피에 길이 있을 것 같아눈동자에 별똥별이 흐를 때까지헤르만 헤세를 탐미하고빨간 줄을 그어가며 외우곤 했다 오롯이 앞만 보고 달릴 땐하늘이 네모난 창문 크기만 했는데그리움의 등을 켜니창문이가 없는 하늘만 하다 두고 온 날들의 이야기나를 스쳐 간 것들이돌아 달려올 때면별똥별 해일이 몰아친다. -림(20130621) https://www.youtube.com/watch?v=KSopc-HDZcE

엄마의 빨랫줄

엄마의 빨랫줄 임 현 숙  그 시절 엄마는아침 설거지 마치고이불 홑청 빨래를 하곤 했다커다란 솥단지에 폭폭 삶아돌판 위에 얹어 놓고탕탕 방망이질을 해댔다고된 시집살이에마음의 얼룩 지워지라고부아난 심정 풀어보려고눈물 대신 그렇게 두드렸을까구정물 맑아진 빨래를마당 이편에서 저편으로말뚝 박은 빨랫줄에 널어놓으면철부지는 그 사이로 신나서 나풀댔다부끄러운 옷까지 대롱대롱 매달린울 엄마 늘어진 빨랫줄은 마음의 쉼터옹이 지고 구겨진 마음이훈풍에 펄럭이고 있었다엄마가 불쑥 그리운 날먼저 가신 하늘에 빨랫줄 매어 놓고엄마의 호박꽃 미소를 널어 본다. -림(20090709)

안개 도로

안개 도로  임 현 숙   온종일 안개가 마을을 먹고 있다 시골집 굴뚝에서 웅성웅성 피어오르던 연기처럼 꾸역꾸역 달려와 지붕을 삼키고 키 큰 나무를 베어 먹더니 지나는 차까지 꿀꺽한다 잿빛 도로가 덜거덕거리며 어깨를 비튼다 문득 사람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등에 업은 삶의 무게가 저 길만 할까 싶다 달리는 쇳덩어리에 고스란히 밟히다가 달빛이 교교한 새벽녘에서야 숨을 돌린다 신과의 싸움에서 진 아틀라스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처럼 거북등 같은 저 길도 돌아눕지 못하는 모진 형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수은등 빛 안개가 아픈 등을 핥으면 워어워엉 슬픈 울림이 안갯속을 걸어 다닌다 길은 붉은 눈물을 떨구고  바라보는 내 등에 날개가 돋는다.  -림(20140117) https:..

바다장(葬礼)

바다장(葬礼)을 바라보며 임현숙  영종대교가 저만치 바라보이는 바다여기라고 손 흔드는 부표파랑 이는 그곳에 이별이 흐른다 언젠간 가야하는 저승길물속에서 태어나 다시 물로 돌아가는  바다장꾹꾹 눌러 우는 울음이 부표를 맴돌고망자는 점점이흐르다 흐르다 파도가 된다 '죽어 누울 방 한 칸을 마련하고 돌아서며세상을 더 사랑하게 될까 봐 울었다'는어느 노시인이 떠올라내 오랜 바람을 일서둘러 저 바다에 묻는다 꽃송이 송이 부표 옆을 흐르며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흔들리는 부표.  -림(20240426)

흐린 봄날의 사색

흐린 봄날의 사색 임 현 숙    밤새 울다 지친 하늘이 시름겨운 낯빛으로 눈 뜨는 아침  찌푸린 구름을 걷고   봄이 오는 산야에푸짐한 햇살을 고루고루 퍼주고 싶다 건넛집 할머니 하회탈 얼굴에 추워 웅크린 꽃망울에 서글픈 마음 벽에 솜털 같은 봄볕을 바르고 싶다 "엄마, 난 괜찮아요."봄빛 닮은 한마디저 하늘로 쏘아 올리고 싶다 여우비 내린다쨍쨍한 햇살로 도배되는 하루는싱그러운 수채화 두루마리.  -림(20240428)

산이 일어선다

산이 일어선다 임현숙 산이 일어선다 투명한 봄햇살에 검푸른 수의를 벗고 있다 푸른 피부가 짓이겨지고 불에 타버려도 죽음을 모르는 불사조 세월 무덤에서 삭정이 털어내며 부활하고 있다 골 따라 흐르는 맑은 피 일어서는 풀향기 꽃향기 아랫마을 숙이는 에취 에취 코앓이 중이지만 마음은 바람 타는 청보리밭이다 산마루 보듬고 있던 하늘도 좋아라 금빛 햇살 펌프질하고 볕에 굶주렸던 겨울 사람 금싸라기 분칠하며 부활의 날개 파드닥거린다 산이 일어선다 산 아래 살아있는 것들이 초록초록하다. -림(20240401) 유투브 업로드 https://www.youtube.com/watch?v=qDcmJFj7Fcg

봄머리에

봄머리에 임 현 숙 잎샘바람 속살에서 봄이 해처럼 솟아오른다 민들레 선한 얼굴로 잔디밭에 발톱을 기르고 겨우내 쓸쓸 주렴 드리운 창가에 정다운 봄볕 놀러 오니 태평양 건너 얼굴 얼굴이 꽃숭어리로 핀다 잘 지내니 언제 볼 수 있을까 살다 보면 만나지겠지 꽃송이마다 팽팽한 말풍선 열리고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풍선 하나하나 터트리며 꽃물 들이는 봄머리 발바닥이 짜 르 르 르 나도 꽃이 되려나 보다. -림(20240320)

멜빵 치마

멜빵 치마 임현숙 내 유년의 옷은 늘 무릎 아래에서 치렁거렸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입어보았을 체크무늬 멜빵 치마 똑같은 옷을 입은 이웃 친구는 탱글탱글한 토마토 같은 무르팍이 방글거리는데 내 치마는 기도하는 수녀처럼 늘 엄숙했다 물려줄 동생도 없고 콩나물처럼 키가 자라서 엄마의 가계부에는 멋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치맛단도 무릎까지 올려 박았고 허리둘레도 가슴통만큼 넓혀 멜빵을 달았다 학교길에 친구랑 나란히 걸어가면 철부지 마음에 먹구름이 일기도 했다 그 시절 기억의 파노라마엔 다음 해에 그 멜빵 치마를 입은 장면이 없다 키보다 앞서간 바람기가 수녀 옷을 거부했을까 딸아이가 교복 치마를 돌돌 걷어 입으면 볼멘소리하다가도 유년의 치마가 떠올라 돌아서 웃었다 세월이 하 흘러 늙은 토마토 같은 무르팍이 ..

새날의 일기

새날의 일기 임현숙  어제는등 뒤로 저문 것들이 더부룩해되새김질하곤 했기에오늘 만나는 새날 앞에맑은국 한 사발 정화수처럼 내어놓습니다 제야의 종소리 한울림마다 빌고 빌었지만이루어질 수 없는 숱한 바람들은그 문장조차 희미해지고빈손엔 미련만이 돌아앉아 있습니다 생의 여름은 저물어이별에 익숙해져야 할가을 빈 벌판에서허옇게 서리 내린 머리 조아리며작은 바람 뭉치 하나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새날에는뒤돌아보지 않게 하소서마음의 텃밭에 미운 가라지가 싹 트지 않게 하소서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게 하소서제야의 종소리를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그것으로 족하다 미소 짓게 하소서 낡은 나무 계단처럼 삐그덕거리는 사연을제야의 종소리에 둥 두웅 실어 보내며첫사랑 같은 새날을맨발로 마중합니다.  -림(2024 새해를 맞으며)..

어둠의 스토킹

어둠의 스토킹 임현숙 불면의 밤 위로 짙은 어둠이 내린다 잠들지 못한 채 어둠을 응시하는 오감 어둠은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큰 입으로 잠들지 못하는 한 영혼을 데려가려 한다 피하면 피할수록 집요하게 따라오는 검은 입술 물러가기를 애원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는 어둠의 스토킹 불을 켜자 창문 밖으로 몸을 숨기는 어둠을 가자미 눈초리로 노려보다 불 끄고 눈감기를 열 번을 더해보아도 더 놀자 더 놀자 지치지 않는 뇌세포들 어둠의 칙칙한 입맞춤을 거부하지 못해 알약 하나를 삼키고 눈을 감으면 깊이 모를 어둠의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숨소리는 쇳소리를 내고 발끝까지 어둠 보에 싸여 시체가 되어간다 컹컹 옆집 개 짖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기상 알람 소리 아침이 오는데 ··· -림(20240202)

새로운 시작/브런치스토리(brunchstory)를 시작하며

나목의 브런치스토리 (brunch.co.kr) 나목의 브런치스토리 밴쿠버지부 시인 | 나목 임현숙 시인의 브런치스토리입니다. brunch.co.kr 새로운 시작/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하며 하루가 자전거처럼 달려간다. 일주일이 자동차처럼 달려간다. 한 달, 일 년이 비행기처럼 날아가 버린다. 내게 남은 시간이 점점 짧아져 간다. 아직도 하고 싶은 말 지금도 달려오는 추억 시와의 사랑에 목마른 나는 새로운 세상에 첫발걸음을 내디딘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 징검돌이 되고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 /나목

추억의 불씨

추억의 불씨 임현숙 하늘이 무너질 듯 겨울비 쏟아져 인적 드문 거리에 물빛 출렁이고 빗방울 소야곡에 시들은 마음 기대면 저문 기억들이 유령처럼 다가온다 창백한 낮달 같은 첫사랑 풋사랑 시작도 없이 엇갈린 이별 말없이 바라보던 그 눈빛을 그때는 어수룩해 읽지 못했노라고 빗살 머리채로 지워질 편지를 쓰고 또 쓴다 그 눈빛 닮은 노을꽃 피는 어느 쓸쓸한 저녁 따스한 불빛으로 켜지기를 겨울비는 늙지도 않는 추억의 불씨를 화르르르 지피고 돌꽃이 된 닿을 수 없는 인연의 고리 굵은 빗살에 걸어본다. -림(20240121)

다가오는 산山

다가오는 산山 임 현 숙 옆집에 일본인 노부부가 살았다 아침마다 부인은 화단에 물을 주고 이따금 세차도 했다 남편은 부인과 외출할 때 잠깐 보일 뿐 조용한 사람 같았다 어느 새벽 삐오삐오~ 구급차가 오고 누군가 실려 나갔다가 아침결에 돌아온 후 밤이 되어 다시 911이 오고 부인의 울음이 애잔하게 새어나왔다 며칠 후 검은 영구차가 집 앞에서 부인과 가족을 태우고 있었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내 방 창가에 앉으면 지척에 산이 보인다 그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날마다 다가오는 산이 있으니 세월 앞에서 천천히 오다가도 때론 달려오는 산 '북망산北邙山 ' 한 차례 아플 때마다 한 걸음 가까이 온 듯하다 누구라도 만날 수밖에 없는 종착역 창밖 저기 저 산처럼 그만한 거리에서 지켜보다가 미련이 미련이 티끌..

거품을 거두고 나면

거품을 거두고 나면 임 현 숙 팔팔 끓는 물에 소고기를 넣으면 거품이 이글거리기 시작한다 말끔히 걷어내고 무를 넣어 진하게 우려내면 맛깔스러운 국이 된다 고난이라는 열탕에 빠져 발버둥치며 하늘을 탓했는데 내 안에서 녹아 나온 거품이 부글거릴수록 맑아지는 시선과 생각 물욕이 얼마나 어리석은 거품인지 깨우치라고 험한 산을 넘게도 불바다에 빠지게도 하셨구나 거품을 바닥까지 토해내고 나니 소태맛처럼 쓴 삶의 맛이 꿀처럼 달다. -림(20231217))

기찻길 따라

기찻길 따라 임현숙 초록이 무성한 여름을 지나 쓸쓸함이 옛정을 깨우는 가을길에서 너는 내게 왔다 사이에 기찻길을 두고 저편은 너의 세상 이편 나의 세상에서 한 점이 될 수 없는 이 간격이 몽글하기만 하다 때로는 꿈에 젖어 침목 수를 헤아리듯 걷는 하룻길 눈꽃 송이 함박 피어날 때면 두 손 꼭 잡은 눈사람으로 겨울이 길어지기를 바라며 맹랑한 눈웃음만 떨군다 황혼을 바라보며 걷는 이 기찻길 기차가 지나쳐버린 어느 간이역에서도 봄처럼 피어나진 못하겠지만 맥박이 살아 뛰는 나란한 이 길 내일도 나는 걸으리. -림(20231128)

하루 요리하기

하루 요리하기 임현숙 손등에 핏줄 미로가 그려진 여자 배추통만 한 무를 자른다 큰 칼이 무 허리에 박혀 꼼짝을 안 한다 다 써가는 치약을 짜듯 파르르 떠는 입술 산다는 건 내 안의 진액을 쥐어 짜내는 것이라며 칼을 이리저리 달래 본다 미로가 산봉우리처럼 솟아나며 무가 두 동강 난다 산다는 건 한 걸음 한 걸음 산마루를 향해 오르는 것이지 산기슭이나 산허리에서 멈출지라도 걸음마다 온 힘을 다했다면 잘 살고 있는 거야 손등에 히말라야 봉우리가 푸르게 솟은 그 여자 몇 굽이 산비탈에서 하루를 깍둑썰고 있다. -림(20231101)

가을날

가을날 임현숙 하늘빛 깊어져 가로수 이파리 물들어가면 심연에 묻힌 것들이 명치끝에서 치오른다 단풍빛 눈빛이며 뒤돌아 선 가랑잎 사람 말씨 곱던 그녀랑 두레박으로 퍼올리고 싶다 다시 만난다면 봄날처럼 웃을 수 있을까 가을은 촉수를 흔들며 사냥감을 찾고 나무 빛깔에 스며들며 덜컥 가을의 포로가 되고 만다 냄비에선 김치찌개가 보글거리고 달님도 창문 안을 기웃거리는데. -림(20230930)

이민가방

이민가방 임현숙  동대문 시장 출신 이민가방 비행기 타러 간다배가 빵빵한 것이 줄행랑치는 펭귄 뒷모습이다 병 안에 모래 담듯 빈틈없이 채워져금방이라도 게울 것 같다여자의 어깨에서 가벼이 꼬리치던 핸드백이 머리에 턱 걸터앉는다'루이 xx' 이름표가 큰 바위처럼 무겁다몸값이 양반과 노비의 차이여서 초라해지지만이민가방은 날씬한 핸드백이 부럽지 않다지난날의 기억과 손때 묻은 것들다시 살 수 없는 보물을 삼킨 불룩한 배가 으쓱하다 낯선 땅에 도착해 간 쓸개까지 다 비우고 나면컴컴한 창고에 쭈그러져 출옥을 기다리는 죄수 신세이겠지만오늘만큼은 승전고를 울리는 장수처럼 당당하다'핸드백, 난 너의 모든 걸 담을 수 있지만 넌 나를 품을 수 없지'시장표 이민가방 양반걸음으로 공항을 누빈다.   -림(20230830)   ..

하얀 샌들

하얀 샌들 임 현 숙 나는 그녀의 하얀 샌들 여름이면 엄지발톱을 빨갛게 물들인 그녀와 종종 나들이를 갔다 어느 날엔 맛있는 냄새가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아줌마들의 찰진 수다가 메탈 음악처럼 귀를 뚫곤 했다 붉은 발톱은 여유로웠고 나는 더위 안에서 추위를 타곤 했다 하얀 살갗이 누레지고 주름지도록 그녀의 작은 발을 사랑하며 또각또각 동행했는데 명랑하던 그녀가 폭폭 울던 그날 이후 신발장 귀퉁이에서 몇 번의 여름을 깜깜하게 보내고 있다 그녀의 슬픈 발에는 키 작은 운동화가 날마다 따라다니고 절인 배추가 되어 돌아온 운동화에선 고달픈 하루 냄새가 배어 나온다 신발장 문이 열릴 때마다 나 여기 있다고 들썩여 봤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그 납작한 운동화만 데리고 간다 땡고추 같은 쌀쌀함이 측은하기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