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시2·다시 부르는 노래 91

용서라는 말의 온도

용서라는 말의 온도 임 현 숙 당신에게로 가는 길 위에서 나는 불꽃으로 돌진하는 불나방이었습니다 오롯이 한 빛만 향해 파닥였지만 회전 벨트처럼 늘 제자리였던 길 때론 외로웠고 때론 슬픔으로 몸부림치며 스스로 상처 입던 길 사랑은 무지개색이라 말하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이글거리던 불꽃에 날개는 얼어버리고 비로소 그 길에서 내릴 수 있었습니다 더는 그립지 않아도 되는 일 더는 아프지 않아도 되는 일 이제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일 한 때 사랑이라 이름하던 그 길에 '용서해'라는 팻말을 박아 놓고 돌아오는 사람 그 말의 소름에 뜨거웠던 기억의 고리마저 고드름꽃이 피어납니다. -림(20230202)

강변에서

강변에서 임현숙 어제는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리운 이름이 낙엽과 뒹굴며 추억의 파노라마를 그렸습니다 오늘도 바람이 붑니다 하얀 눈발 억새풀 머리에 꽃잎처럼 쌓이고 마음은 바다 건너 서편에 머무는데 내 정처없는 발길은 강 건너 남쪽 그리움의 강변을 따라 걷습니다 바다는 시퍼런 파도로 철썩이지만 저 강물은 보드라운 물결로 허기진 마음뚝을 다독입니다 더는 바닷가에서 저녁놀을 기다리지 말라고 푸른 강 저기에 뜨는 노을이 그보다 뜨겁다고 속삭입니다. -림(20230201)

내 발등 내가 찍었다

내 발등 내가 찍었다 임현숙 작은 정원을 꾸미고 있었다 단풍나무 아래에 달빛 같은 물망초도 심고 울 엄마 닮은 나팔꽃도 심고 패랭이꽃, 금낭화 오밀조밀 심고 나니 크고 화려한 꽃을 심고 싶었다 작약 나무를 고르자 주변 사람들 모두 아니라 했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병든 흔적이 보인다며 고개를 저었다 잘 키울 수 있다고 자신하며 덜컥 심었는데 꽃은커녕 숨어있던 병이 가지마다 출렁거린다 가지를 쳐내고 수혈을 해봐도 고질병인가 보다 '내 발등 내가 찍었다.' 때로는 조언을 귀담아들어야겠다. -림(20230125)

그래요

그래요 임현숙   저 위에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실 때그분만이 아는 예치금이 담긴 통장을목숨에 붙여 주셨어요찾기 싫어도 날마다 줄어드는데건강이라는 이자가 붙어 조금 불어나긴 해요  건강하게 살려면 이렇게 하라 이걸 먹어라눈으로 귀로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도맘 내키는 대로 살아왔지요 나무 한 그루도 잘 돌보지 않으면푸른 이파리 벌레 먹고 갈변하듯이먹물 같던 머리 하얀 서리꽃 밭인 지금제멋대로 살아온 대가를 치르는 중이에요소화제 한 번 안 드시던 시어머니팔십 오수를 누리다 하늘로 가셨는데내 통장 잔고는 얼마나 될까요 여름을 지나며 옷 서랍을 정리하는데입지 않고 그냥 낡고 있는 옷들 위로올해 산 옷들이 거드름 피우고 있어요섬광처럼 꾸짖는 소리 들려요 '살아온 세월보다 남은 시간이 더 짧단다.' 그래요허리 꺾인 세..

칼꽃의 바람

칼꽃의 바람 임 현 숙 전화기 너머에서 칼과 칼이 부딪치고 핏빛 칼꽃이 만발해요 동물의 말소리처럼 음성도 억양과 색깔이 다 다르죠 싫은 소리도 상냥하면 달콤하게 들리고 예사말도 거칠면 욱하게 해요 꽃잎에 베인 가슴에 핏방울이 맺히고 팡 터질 때마다 성품이 드러나지요 카나리아처럼 말하고 싶은데 입술이 길길이 칼꽃을 피우니 귀를 봉해야 할까 입술을 잠가야 할까요. -림(20220817)

민들레

민들레 임 현 숙 하늘 아래 낮게 피어 고개 떨구지 않는 풀꽃 강아지가 오줌을 깔기고 가도 노랗게 웃는 얼굴 잔디밭의 천덕꾸러기지만 꽃잎 이파리 뿌리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약초 바람 따라 날아가 부활하는 민들레꽃 누군가는 오늘도 모가지를 비틀고 그 누군가는 송두리째 파내겠지만 나는 어제 민들레 홀씨 하나 마음밭에 심었다. -림(20220423)

노루를 찾습니다

노루를 찾습니다 나목 임현숙 긴 귀를 쫑긋거리며 큰길 앞에 서 있는 노루 가족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어미가 앞장서 길을 건넌다 노루는 울부짖기보다 귀를 잘 기울인다 뉘엿뉘엿 해넘이 길에 귀 막은 동물들의 입씨름 고여있는 생각 때문일까 외로움 탓일까나 제발 귀를 좀 열어주세요~ 노루는 어디에 있을까 왠지 섧다. -림(20220326)

백조의 꿈

백조의 꿈 나목 임현숙 꽃 각시 시절 우아한 백조를 보았다 희끗희끗한 올림머리 치자꽃 내음 머금은 지금의 내 나이 또래 그녀 오래도록 거울 앞에서 그려보곤 했다 훗날 그녀처럼 되어야지 그 나이 오늘 거울 안엔 눈빛도 살빛도 닮지 않은 황조롱이 무거운 날개 닦고 있다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일선에 선 슬픈 눈빛 메기수염 입가 주름은 천일 또 또 천일의 이력 아 거울 안 백조의 꿈은 저만치 날아갔건만 거울 밖 황조롱이 가슴엔 노을빛 부서지는 다뉴브강이 물결친다. -림(20220323)

저어기 아롱거리는

저어기 아롱거리는 나목 임현숙 봄, 이 봄은 상냥하기도 하지 고목에도 새 이파리 돋아나네 꽃바람 미끄러지며 연두 꽃망울 너울대고 아지랑이처럼 추억이 피네 낡아 깁고 덧댄 기억들 나그네 긴 여정에 낙타의 두 혹 같은 것 새봄이 찾아와도 두근거리지 않을 화석으로 남아 풀잎 꽃 낙엽 눈··· 사철 피어나는 돌꽃이어라 그래 오랜 추억은 기억일 뿐 이 봄엔 푸른 향기를 그리워하자 기억 저어편 그것 말고 저어기 아롱거리는 신기루 같은. -림(20220310)

겨울을 보내며

겨울을 보내며 나목 임현숙 바다를 건너온 봄이 겨울잠이 목마른 내 빈한 뜨락에 바다 빛 수다를 풀어놓는다 지난겨울은 순결한 눈빛으로 기도를 가르쳤다 빈 들에서 주린 이를 위하여 눈밭에서 헐벗은 이를 위하여 겨울비처럼 눈물짓는 이를 위하여 다시 드러날 나의 허물을 위하여 지난겨울은 마음 수련원이었다 무언의 회초리로 내 안에 파도치는 노여움과 모난 등성이를 꾸짖어 참 어른다운 자리로 이끌었다 봄이면 철부지로 되돌아갈 일 겨울마다 받은 수십 개의 수료증이 마음 벽을 도배한다 이제 돌아갈 때라는 듯 봄의 헛기침이 뒷산의 잔설을 불어 내자 잰걸음으로 떠나는 겨울 미련 없이 꽃바람 품에 안기며 겨울의 언어로 배웅한다 다음에도 지엄한 회초리를 기다리겠다고. -림(20220222)

오래되면

오래되면 나목 임현숙 늙수그레한 용달차 팔팔해 보여도 매일 점검을 해야 해 더 오래된 차는 아직 젊어 좋겠다고 말하지 그래 서른 살 된 차가 보기엔 스무 살은 청년이지 스무 살의 절반은 짐이 깨끗하고 단출해서 날아다녔지 단 한 번의 추돌 사고 후 내 등에 실린 건 쇠붙이였다네 발이 땅에 붙게 버거워 헉헉거리다가도 이 짐이 누군가의 밥이 되고 날개가 된다는 것이 새 원동력이 되었어 언덕을 오를 때면 거북이가 되지만 조금 느리면 어때 심장이 멈출 때까지 달려갈 테야 낡고 긴 터널을 지나며 빛을 향해 뛰어가고 싶은 그 여자 아침마다 오래된 혈관에 윤활유를 붓는다. -림(20220215) 한국문협 부산지부/월간 문학도시2022년 8월호/기획특집/해외 한국문학 수록

겨울비에게

겨울비에게 나목 임 현 숙 겨울비는 줄곧 내리고 창가 의자와 한 몸 되어 무생물이 되어간다 흐린 눈빛이 거리를 내다보면 힘차게 달리는 자동차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장대비 내려 빈 눈빛에 강물이 찰랑대게 해 주렴 번개야 휴화산 심장에 도화선이 돼주렴 천둥아 깊이 잠든 이성을 벌떡 깨워주렴 눈 감으면 떠오르던 먼 그리움 말라버린 눈물조차도 새살처럼 돋아나기를 겨울비여 나는 살아 있고 싶다. -림(20220204)

회상

회상 나목 임 현 숙 눈 오는 밤 거침없이 내리는 저 눈발은 오랜 기억의 편린들 밤이 깊을수록 눈발은 이 가슴 후비고 머언 곳으로부터 날아오는 모스부호 나는 잊었다 했는데 가슴에 묻었다 했는데 슬그머니 나부끼는 청춘의 분홍 깃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새로 태어날 수 있다면 분홍 대신 나만의 파랑길을 걸으리. -림(20211220)

아픔보다 더한 아픔

아픔보다 더한 아픔 나목 임 현 숙 목에 쇠침이 박혔다 설마 했던 그놈이 내게도 들어왔다 대문에 빗장 건 이레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 마른 갈대 입술을 열면 작렬하는 쇳소리 한솥밥 식구들은 겉보기엔 나이롱환자 망할 균이 흥해서 우쭐대는 중이지만 1차 2차 3차 저항군이 절대 백기는 들지 않을 것 분연히 항거하는 더운 숨소리 아프다 너와 내가 곁눈으로 눈치 보며 저 건너에서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이. -림(20220116)

연말정산

연말정산 나목 임 현 숙 먼 옛날엔 연말이 다가오면 대중목욕탕에서 때 정산을 하곤 했다 그 시절 어머니 손길 그리워 먼 하늘 바라보다 오늘 때밀이 대신 마사지를 받는다 수줍은 첫 경험 미지의 문을 열고 들어서서 나보다 작은 여자의 안내를 받고 탈의 후 엎드려 누워 심호흡하면 깊숙이 밀려오는 라벤더 향기 어제의 모자란 잠이 파도친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들이 피아노를 연주하듯 굴러갈 때마다 뻐근하다고 엄살 부리던 근육이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른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세포들에 주는 선물 석화된 마음마저도 마시멜로가 되어 미운 사람을 안아주고 싶어진다 사랑할까 두려운 연말정산이다. -림(20211221)

김치와 손녀

김치와 손녀 나목 임 현 숙 만 네 살인 손녀 가르치지 않아도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솜씨가 놀랍다 나랑 한국말로 조잘거리다가 순간 지 아빠와 영어로 재잘거린다 자동 반사하는 그 이쁜 입술이 가끔 날 삐지게도 한다 '할머니 손에서 냄새 나' '어휴 김치 냄새' 손을 깨끗이 씻어도 때로 음식 냄새가 배어있기 마련 냄새 묻은 손으로 주는 음식은 밀어낸다 수십 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김치 인이 박인 마약을 손녀와 더 알콩달콩 지내려면 멀리해야 할까. -림(20211210)

가을 기도

가을 기도 임 현 숙 수수하던 이파리 저마다 진한 화장을 하는 이 계절에 나도 한 잎 단풍이 되고 싶다 앙가슴 묵은 체증 삐뚤거리던 발자국 세 치 혀의 오만한 수다 질기고 구린 것들을 붉게 타는 단풍 숲에 태우고 싶다 그리하여 찬란한 옷을 훌훌 벗고 겸손해진 겨울 숲처럼 고요히 고요히 사색에 들어 입은 재갈을 물고 토하는 목소리에 귀담아 오롯이 겸허해지고 싶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아 부름에 선뜻 대답할 수 있기를 겨울이 묵묵히 봄을 준비해 봄이 싱그럽게 재잘거리는 것처럼 나도 무언가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림(20211022)

그런 날

그런 날 임 현 숙 개미 발소리가 들리는 날 *까똑 소리가 기다려지는 날 딸아이의 귀가를 재촉하는 날 잘 정리된 서랍을 다시 뒤적이는 날 그런 날엔 애꿎은 추억을 벌씌운다 *까똑까똑 말 거는 것이 귀찮은 날 말벗이 되어주는 딸아이가 성가신 날 넋 놓고 있고 싶은 날 그런 날엔 내게 타이른다 산다는 건 낡은 추억을 깁는 게 아니라 싱싱한 추억거리를 짓는 거라고. -림(20210609) *카카오톡 알림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