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시2·다시 부르는 노래 117

설날 풍경 한 점

설날 풍경 한 점 임현숙  그 해 설날 오후보란 듯이 차린 상을 물리고 나면진초록 들판에 열두 달이 엎치락뒤치락다섯 마리 새가 날고 폭탄이 터졌다사돈간에 화투패 들고 앉아 허허허남의 설사를 좋다고 긁어가고피박, 광박 징한 용어들을 뱉어가며 눈치 싸움을 즐겼다 격도 체면도 뱀 허물처럼 벗어버린사돈끼리의 우애로운 자리였는데이국땅에서 그들 없는 설날을 만나니상 차리느라 해쓱하던 시간이 보물처럼 비쳐온다 잔소리쟁이 작은 언니 막내 요리는 눈도 즐겁다던 큰오빠 그림처럼 앉아 받기만 하던 손위 시누이도 기억 속에서 고대로인데 언젠가 다시 만날 명절에는 하나둘 먼 길 떠나  빈자리엔 귀에 익은 목소리만 희미하겠다  명치에 박제된 그날의 군상 돌아가고 싶은 우리 자리.  -림(20250122) https://www.y..

부앙부앙 울었다

부앙부앙 울었다 임현숙               부앙 울리는 저음의 색소폰 소리칠순의 멋쟁이 오빠는황혼의 회한을 불어대고 있었다힘겨운 날숨은 지난날의 보람이요꺼지지 않은 불꽃의 여생인 것을아우들이 알아주길 바랐을까삐걱대는 음에 키득거리던 못난 아우들을발그레 웃으며 바라보던큰 오라버니는다시 들을 수 없는 울림을 남기고은하 별이 되었다내 어릴 적에 예쁜 막내라고친구 모임에 손잡고 다니셨는데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도 못 해부앙부앙 울었다.  -림(20111128)   https://www.youtube.com/watch?v=dZrT2o9TfOQ

그런 날에는

그런 날에는 임 현 숙  개미 발소리가 들리는 날*까똑 소리가 기다려지는 날딸의 귀가를 재촉하는 날잘 정리된 서랍을 다시 뒤적이는 날그런 날엔 애꿎은 추억을 벌씌운다 *까똑까똑 말 거는 것이 귀찮은 날말벗이 되어주는 딸아이가 성가신 날넋 놓고 있고 싶은 날그런 날엔 내게 타이른다산다는 건 낡은 추억을 깁는 게 아니라싱싱한 추억거리를 짓는 거라고.  -림(20210609)*카카오톡 알림 소리  https://www.youtube.com/watch?v=jUgmEOcxsBw

겨울비에 베이다

겨울비에 베이다  임현숙  하늘도 땅도 물바다댓살 같은 겨울비 어느 휠체어 바퀴에 처덕거리다가내 무릎에 와 가시로 박힌다 기울은 세월의 미운 짓가슴 저며오는 한기 언제였던가 겨울비가 마음 데우던 시절우산 안에서 더 가까워지던 우리비보라 칠수록 더운 김 오르고 첨벙거리며 달려도 짱짱하던 무르팍이여 그날처럼 우산을 펴 들었지만빗방울 둥근 칼날 가슴에 붉은 길을 낸다 빗소리는 미안하다 하고성난 무릎따스한 기억에 기대어구들목 찾아 터덜거리는데 건널목이 십 리 길인 듯 푸른 신호 깜박깜박빗줄기 쫓아오며 신들린 칼춤을 추어대고.  -림(20241215) https://www.youtube.com/watch?v=t6FjZUKG54M

새해를 맞으며

새해를 맞으며 임 현 숙   묵은 달력을 내려놓습니다내 마음처럼 무게가 천근이어요장마다 빼곡한 사연들을 되새겨보니복덩어리가 수북합니다가진 게 없다고 빈손이라고 하늘에 떼쓰던 두 손이 부끄러워집니다 가붓한 새 달력을 그 자리에 둡니다내 마음도 새 달력 같습니다오늘또 오늘 쌓일 복 더미 생각에손등에 푸른 핏줄이 더 불거집니다. -림(20201223) https://www.youtube.com/watch?v=nPHjwWkV5U8

새날의 일기

새날의 일기 임현숙  어제는등 뒤로 저문 것들이 더부룩해되새김질하곤 했기에오늘 만나는 새날 앞에맑은국 한 사발 정화수처럼 내어놓습니다 제야의 종소리 한울림마다 빌고 빌었지만이루어질 수 없는 숱한 바람들은그 문장조차 희미해지고빈손엔 미련만이 돌아앉아 있습니다 생의 여름은 저물어이별에 익숙해져야 할가을 빈 벌판에서허옇게 서리 내린 머리 조아리며작은 바람 뭉치 하나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새날에는뒤돌아보지 않게 하소서마음의 텃밭에 미운 가라지가 싹 트지 않게 하소서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게 하소서제야의 종소리를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그것으로 족하다 미소 짓게 하소서 낡은 나무 계단처럼 삐그덕거리는 사연을제야의 종소리에 둥 두웅 실어 보내며첫사랑 같은 새날을맨발로 마중합니다. -림(2024 새해를 맞으며) ..

겨울비여, 나는

겨울비여, 나는 임현숙   겨울비 지칠 줄 모르고 퍼붓고 헐거워진 몸 창가 의자에 붙어빈 껍데기가 되어간다 멍하니 바라보는 거리엔힘차게 달리는 자동차들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허탈한 실소반쯤 빈 몸을 의자에서 떼어내며또르륵 즐거운 빗방울에하소연한다 번개 번쩍인다면마른 지푸라기 감성에 불붙겠니벼락이라도 우르릉한다면무른 연필심 단단해질까 눈 감으면 떠오르던 먼 그리움말라버린 눈물조차도새살처럼 돋아나기를 겨울비여나는총총히 살아 있고 싶다.  -림(20220204)   https://www.youtube.com/watch?v=vSDwymfXSBc

겨울비, 그 따스함에 대하여

겨울비, 그 따스함에 대하여 임현숙  겨울비에 젖어글썽글썽한 나목을 바라보다마음 둑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깊이 묻어버린 가을타오르던 단풍잎 생각나흔적을 찾아 두리번거려도주룩주룩 빗줄기만이 출렁이는저녁 무렵이글거리던 불꽃 사위었지만불씨는 살아다시 타오를 날 기다리겠지요가로등 불빛 번져가며야윈 가지엔 하얀 별송이 부스러지고축축한 내 마음 뒤란덤불 속에서초롱불 하나 따사로이 살아 오릅니다. -림(20151226)  https://www.youtube.com/watch?v=7FG0dX5kdfI

잃어버린 그 겨울

잃어버린 그 겨울 임현숙                                                          마당 세숫대야에 손이 쩍 달라붙던그해 겨울 등굣길코밑엔 고드름이 열리고교복 치마 아래 종아리가 알알하도록 추웠네 ​동동 발 구르다 올라탄 만원 버스팔다리 기울어져도 따스해서 좋았지붙어선 남학생이 오해할까 봐얼었던 양 볼수줍어 수줍어 홍시가 되었네 겨울은 오고 또 또 돌아와코끝이 찡하건만그대 뜨거운 손 잡아도두 볼엔 성에꽃 창백하네그해 겨울의 수줍은 홍시를어디쯤에서 잃어버린 걸까 ​붉어지지 않는 이 참담한 겨울이여.   -림(20131221) https://www.youtube.com/watch?v=7BIwSNsHrvM

세월의 한 갈피를 넘기며

세월의 한 갈피를 넘기며 임현숙  발걸음이 허둥거린다십이월이다욕망의 깃털을 다 떨군 나무가성자의 눈초리로 깃털 무성한 사람을 바라본다 나무처럼 살고 싶었으나 삶의 꼭두각시였던 나빗장 걸린 일상의 쳇바퀴에 배설물이 그득하다오래 묵어도 삭지 않는 것들은 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걸까쪼그라진 심장에 더께더께 얼룩진 상흔인연의 숲에서 긁히고 베인 심장을 치료한 것은지극히 사소한 것이었다귓불 적시는 빗방울 소리라던가한 줄의 시구에서 아롱지던 햇살꽃그리고그냥 생각나서 걸었다는 누구의 전화 같은스쳐 가는 것들이 수호천사였다고맙구나 내 곁을 스치는 것이여어쩌면 내일엔닿지 않는 것을 탐하던 붉은 깃털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갈지자 그리던 신발 콧등 나란히세월의 한 갈피를 넘기며뒤안길로 점점이 흩어지는 붉은 깃털들. -림..

뒷모습에는

뒷모습에는 임 현 숙   수평선 너머가 그리운 이는 뒷모습이 쓸쓸하다푸른 정맥이 불끈하도록 손잡았던 것들을날마다 되새김질하는 사람이다 뒷모습이 젖어있는 사람은별이 된 어머니 곁에총총 그리운 얼굴들 바라보며옛일이 사무치는 사람이다 서글픈 뒷모습은첫눈처럼 설레는 그리움이닿을 수 없는 저편의무지개라는 걸 아는 사람이다 겨울 햇살처럼 웃고 있는너의 뒷모습에 어린 것은심연의 그림자였다. -림(20150809) https://www.youtube.com/watch?v=r9_TXaNeQEw

마지막 이파리 지다

마지막 이파리 지다  임 현 숙   창밖 미루나무 마지막 이파리 뚝 지던 날 비가 내렸다 나무는 이별이 서러워 주룩주룩 울었다 붉디붉게 익고 나면 이글거리던 불꽃 사그라지듯 지고 만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떨어진 자리 상처 아물고 새봄이 온들 다시는 움트지 않을 사랑이 지나간 자리빗방울이 모질게 파고들었다 오직 한 잎 바람 되던 날 나무는 오래도록 비에 젖었다.  -림(20141020)  https://www.youtube.com/watch?v=1PHKwTQETO8

내 가을의 주인

내 가을의 주인 임현숙                                           마른 잎의 춤사위가사그라지는 불씨를 풀무질하는늦가을 가을 올가미에 걸려바둥거릴수록울대가 부어오르는데 왜단풍은 서럽게 붉은 건지마음 골에 맺히던 핏빛 꽃망울 무엇일까이 향기로운 몸부림은 낙엽 무덤 위에툭툭떨어지는 꽃숭어리 화석이 된 그리움내 가을의 주인이었네. -림(20241104) https://youtu.be/Xy9OeUlzr94

사랑에 살다 보면

사랑에 살다 보면 임 현 숙  사랑 부싯돌에 녹아내린 몽당양초시간이 흐르며심지도 타들어 갈 거란 걸모르지 않았다 어려선 엄마만 졸졸거리는 병아리였고친구가 좋아지며꿈을 심어 준 엄마는 등 뒤로 밀려났다당신이라는 은하에 둥지를 틀고 아기별들과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 보니지천명이 훌쩍 지나고풋풋하던 꿈이 소멸하고 있었다 멈칫생의 가을길에서오래전 촛농이 되어버린 꿈의 기억살아나며 울먹이는데어린 손녀 날 부르며 달려온다 사랑 · · ·알면서도텀벙거리는마그마 늪이었다. -림(20241020)   https://www.youtube.com/watch?v=lPl7kPJoZes

함지박이 좋다

함지박이 좋다  임현숙   투박한 함지박은 좁쌀만 한 것 모난 것너부데데한 것 길쭉한 것불평 없이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오이는 여드름이 많아 싫고 호박은 쉬 물러터져 안되고 이래서 저래서 툴툴 골라내고 투정해 봤자 길어야 백 년 남짓한 세상살이  벗이여함지박처럼너그러이오늘을 보듬고 살자.  -림(20130716)  https://www.youtube.com/watch?v=aVWB-PpIFio

가을 나무

가을 나무  임 현 숙   머얼리노을이 손짓하는 언덕에빈손으로 선 나는가을 나무입니다갈 볕이 붉은 물 들인 자리샘 많은 바람이 쓸어내면데구루루내 이름표 붙은 이파리들이저 시공으로 사라집니다하나둘이 세상 소유문서에서내 이름이 지워집니다노을빛이 익어갈수록움켜쥐었던 두 주먹손바닥을 보이며삶의 굴레에서 해방됩니다.   -림(20151105)   https://www.youtube.com/watch?v=-P3Kd5KuM98

가을 기도

가을 기도 임 현 숙   수수하던 이파리저마다진한 화장을 하는 이 계절에나도 한 잎 단풍이 되고 싶다앙가슴 묵은 체증삐뚤거리던 발자국세 치 혀의 오만한 수다질기고 구린 것들을붉게 타는 단풍 숲에 태우고 싶다찬란한 옷을 훌훌 벗고겸손해진 겨울 숲처럼고요히고요히입은 재갈을 물고토하는 목소리에 귀담아오롯이 겸허해지고 싶다나를 온전히 내려놓아부름에 선뜻 대답할 수 있기를겨울이 묵묵히 봄을 준비해봄이 싱그럽게 재잘거리는 것처럼나도 무언가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림(20211022)  https://www.youtube.com/watch?v=LRBbbSngvPU

시월의 밤

시월의 밤 임 현 숙  푸르던 이파리피에로가 되는 시월의 밤붉은 조각달이 내려다본다 별빛보다 은근히앞서가며 동행하더니 가을이라는 독주에 달빛이 취했다하늘이 붉다 가로수 화르렁 거리는시월의 깊은 밤불면의 창을 기웃대는저 농익은 달빛 쭈그러지던 하루가어깻죽지를 편다살아야겠다.  -림(20241007) https://www.youtube.com/watch?v=47ZWjlDae4s

가을을 걷다

가을을 걷다 임현숙  붉어진 가을을 걷는다뚜두둑내 몸 가지들의 이유 있는 저항한들한들 코스모스라고 우겨왔는데갈잎을 빼닮아 간다푸르게 져버린 벗처럼언젠간 맞이할 석별의 순간늘 붙어 다니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걷는다내 사랑하는 이들이 앞서 건너간그 '망각의 강' 저편에도가을이 찾아갈까보내지 않아도 세월이 가고기다리지 않아도 계절은 다시 만나건만강 건너편 사람은 소식도 모르는구나 낙엽 밟는 소리 낭만인 건 옛이야기바사삭세월 바서지는 소리 듣는다설익은 단풍잎 훠월헐'망각의 강'을 건너가고.  -림(20241002) https://www.youtube.com/watch?v=u5vMQlneAIk&t=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