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시2·다시 부르는 노래 91

봄머리에

봄머리에 임 현 숙 잎샘바람 속살에서 봄이 해처럼 솟아오른다 민들레 선한 얼굴로 잔디밭에 발톱을 기르고 겨우내 쓸쓸 주렴 드리운 창가에 정다운 봄볕 놀러 오니 태평양 건너 얼굴 얼굴이 꽃숭어리로 핀다 잘 지내니 언제 볼 수 있을까 살다 보면 만나지겠지 꽃송이마다 팽팽한 말풍선 열리고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풍선 하나하나 터트리며 꽃물 들이는 봄머리 발바닥이 짜 르 르 르 나도 꽃이 되려나 보다. -림(20240320)

멜빵 치마

멜빵 치마 임현숙 내 유년의 옷은 늘 무릎 아래에서 치렁거렸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입어보았을 체크무늬 멜빵 치마 똑같은 옷을 입은 이웃 친구는 탱글탱글한 토마토 같은 무르팍이 방글거리는데 내 치마는 기도하는 수녀처럼 늘 엄숙했다 물려줄 동생도 없고 콩나물처럼 키가 자라서 엄마의 가계부에는 멋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치맛단도 무릎까지 올려 박았고 허리둘레도 가슴통만큼 넓혀 멜빵을 달았다 학교길에 친구랑 나란히 걸어가면 철부지 마음에 먹구름이 일기도 했다 그 시절 기억의 파노라마엔 다음 해에 그 멜빵 치마를 입은 장면이 없다 키보다 앞서간 바람기가 수녀 옷을 거부했을까 딸아이가 교복 치마를 돌돌 걷어 입으면 볼멘소리하다가도 유년의 치마가 떠올라 돌아서 웃었다 세월이 하 흘러 늙은 토마토 같은 무르팍이 ..

새날의 일기

새날의 일기 임현숙 어제는 등 뒤로 저문 것들이 더부룩해 되새김질하곤 했기에 오늘 만나는 새날 앞에 맑은국 한 사발 정화수처럼 내어놓습니다 제야의 종소리 한울림마다 빌고 빌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숱한 바람들은 그 문장조차 희미해지고 빈손엔 미련만이 돌아앉아 있습니다 생의 여름은 저물어 이별에 익숙해져야 할 가을 빈 벌판에서 허옇게 서리 내린 머리 조아리며 작은 바람 뭉치 하나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새날에는 뒤돌아보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텃밭에 미운 가라지가 싹 트지 않게 하소서 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게 하소서 제야의 종소리를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미소 짓게 하소서 낡은 나무 계단처럼 삐그덕거리는 사연을 제야의 종소리에 둥 두웅 실어 보내며 첫사랑 같은 새날을 맨발로 마중합니다...

어둠의 스토킹

어둠의 스토킹 임현숙 불면의 밤 위로 짙은 어둠이 내린다 잠들지 못한 채 어둠을 응시하는 오감 어둠은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큰 입으로 잠들지 못하는 한 영혼을 데려가려 한다 피하면 피할수록 집요하게 따라오는 검은 입술 물러가기를 애원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는 어둠의 스토킹 불을 켜자 창문 밖으로 몸을 숨기는 어둠을 가자미 눈초리로 노려보다 불 끄고 눈감기를 열 번을 더해보아도 더 놀자 더 놀자 지치지 않는 뇌세포들 어둠의 칙칙한 입맞춤을 거부하지 못해 알약 하나를 삼키고 눈을 감으면 깊이 모를 어둠의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숨소리는 쇳소리를 내고 발끝까지 어둠 보에 싸여 시체가 되어간다 컹컹 옆집 개 짖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기상 알람 소리 아침이 오는데 ··· -림(20240202)

새로운 시작/브런치스토리(brunchstory)를 시작하며

나목의 브런치스토리 (brunch.co.kr) 나목의 브런치스토리 밴쿠버지부 시인 | 나목 임현숙 시인의 브런치스토리입니다. brunch.co.kr 새로운 시작/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하며 하루가 자전거처럼 달려간다. 일주일이 자동차처럼 달려간다. 한 달, 일 년이 비행기처럼 날아가 버린다. 내게 남은 시간이 점점 짧아져 간다. 아직도 하고 싶은 말 지금도 달려오는 추억 시와의 사랑에 목마른 나는 새로운 세상에 첫발걸음을 내디딘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 징검돌이 되고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 /나목

추억의 불씨

추억의 불씨 임현숙 하늘이 무너질 듯 겨울비 쏟아져 인적 드문 거리에 물빛 출렁이고 빗방울 소야곡에 시들은 마음 기대면 저문 기억들이 유령처럼 다가온다 창백한 낮달 같은 첫사랑 풋사랑 시작도 없이 엇갈린 이별 말없이 바라보던 그 눈빛을 그때는 어수룩해 읽지 못했노라고 빗살 머리채로 지워질 편지를 쓰고 또 쓴다 그 눈빛 닮은 노을꽃 피는 어느 쓸쓸한 저녁 따스한 불빛으로 켜지기를 겨울비는 늙지도 않는 추억의 불씨를 화르르르 지피고 돌꽃이 된 닿을 수 없는 인연의 고리 굵은 빗살에 걸어본다. -림(20240121)

다가오는 산山

다가오는 산山 임 현 숙 옆집에 일본인 노부부가 살았다 아침마다 부인은 화단에 물을 주고 이따금 세차도 했다 남편은 부인과 외출할 때 잠깐 보일 뿐 조용한 사람 같았다 어느 새벽 삐오삐오~ 구급차가 오고 누군가 실려 나갔다가 아침결에 돌아온 후 밤이 되어 다시 911이 오고 부인의 울음이 애잔하게 새어나왔다 며칠 후 검은 영구차가 집 앞에서 부인과 가족을 태우고 있었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내 방 창가에 앉으면 지척에 산이 보인다 그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날마다 다가오는 산이 있으니 세월 앞에서 천천히 오다가도 때론 달려오는 산 '북망산北邙山 ' 한 차례 아플 때마다 한 걸음 가까이 온 듯하다 누구라도 만날 수밖에 없는 종착역 창밖 저기 저 산처럼 그만한 거리에서 지켜보다가 미련이 미련이 티끌..

거품을 거두고 나면

거품을 거두고 나면 임 현 숙 팔팔 끓는 물에 소고기를 넣으면 거품이 이글거리기 시작한다 말끔히 걷어내고 무를 넣어 진하게 우려내면 맛깔스러운 국이 된다 고난이라는 열탕에 빠져 발버둥치며 하늘을 탓했는데 내 안에서 녹아 나온 거품이 부글거릴수록 맑아지는 시선과 생각 물욕이 얼마나 어리석은 거품인지 깨우치라고 험한 산을 넘게도 불바다에 빠지게도 하셨구나 거품을 바닥까지 토해내고 나니 소태맛처럼 쓴 삶의 맛이 꿀처럼 달다. -림(20231217))

기찻길 따라

기찻길 따라 임현숙 초록이 무성한 여름을 지나 쓸쓸함이 옛정을 깨우는 가을길에서 너는 내게 왔다 사이에 기찻길을 두고 저편은 너의 세상 이편 나의 세상에서 한 점이 될 수 없는 이 간격이 몽글하기만 하다 때로는 꿈에 젖어 침목 수를 헤아리듯 걷는 하룻길 눈꽃 송이 함박 피어날 때면 두 손 꼭 잡은 눈사람으로 겨울이 길어지기를 바라며 맹랑한 눈웃음만 떨군다 황혼을 바라보며 걷는 이 기찻길 기차가 지나쳐버린 어느 간이역에서도 봄처럼 피어나진 못하겠지만 맥박이 살아 뛰는 나란한 이 길 내일도 나는 걸으리. -림(20231128)

하루 요리하기

하루 요리하기 임현숙 손등에 핏줄 미로가 그려진 여자 배추통만 한 무를 자른다 큰 칼이 무 허리에 박혀 꼼짝을 안 한다 다 써가는 치약을 짜듯 파르르 떠는 입술 산다는 건 내 안의 진액을 쥐어 짜내는 것이라며 칼을 이리저리 달래 본다 미로가 산봉우리처럼 솟아나며 무가 두 동강 난다 산다는 건 한 걸음 한 걸음 산마루를 향해 오르는 것이지 산기슭이나 산허리에서 멈출지라도 걸음마다 온 힘을 다했다면 잘 살고 있는 거야 손등에 히말라야 봉우리가 푸르게 솟은 그 여자 몇 굽이 산비탈에서 하루를 깍둑썰고 있다. -림(20231101)

가을날

가을날 임현숙 하늘빛 깊어져 가로수 이파리 물들어가면 심연에 묻힌 것들이 명치끝에서 치오른다 단풍빛 눈빛이며 뒤돌아 선 가랑잎 사람 말씨 곱던 그녀랑 두레박으로 퍼올리고 싶다 다시 만난다면 봄날처럼 웃을 수 있을까 가을은 촉수를 흔들며 사냥감을 찾고 나무 빛깔에 스며들며 덜컥 가을의 포로가 되고 만다 냄비에선 김치찌개가 보글거리고 달님도 창문 안을 기웃거리는데. -림(20230930)

이민가방

이민가방 임현숙  동대문 시장 출신 이민가방 비행기 타러 간다배가 빵빵한 것이 줄행랑치는 펭귄 뒷모습이다 병 안에 모래 담듯 빈틈없이 채워져금방이라도 게울 것 같다여자의 어깨에서 가벼이 꼬리치던 핸드백이 머리에 턱 걸터앉는다'루이 xx' 이름표가 큰 바위처럼 무겁다몸값이 양반과 노비의 차이여서 초라해지지만이민가방은 날씬한 핸드백이 부럽지 않다지난날의 기억과 손때 묻은 것들다시 살 수 없는 보물을 삼킨 불룩한 배가 으쓱하다 낯선 땅에 도착해 간 쓸개까지 다 비우고 나면컴컴한 창고에 쭈그러져 출옥을 기다리는 죄수 신세이겠지만오늘만큼은 승전고를 울리는 장수처럼 당당하다'핸드백, 난 너의 모든 걸 담을 수 있지만 넌 나를 품을 수 없지'시장표 이민가방 양반걸음으로 공항을 누빈다.   -림(20230830)   ..

하얀 샌들

하얀 샌들 임 현 숙 나는 그녀의 하얀 샌들 여름이면 엄지발톱을 빨갛게 물들인 그녀와 종종 나들이를 갔다 어느 날엔 맛있는 냄새가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아줌마들의 찰진 수다가 메탈 음악처럼 귀를 뚫곤 했다 붉은 발톱은 여유로웠고 나는 더위 안에서 추위를 타곤 했다 하얀 살갗이 누레지고 주름지도록 그녀의 작은 발을 사랑하며 또각또각 동행했는데 명랑하던 그녀가 폭폭 울던 그날 이후 신발장 귀퉁이에서 몇 번의 여름을 깜깜하게 보내고 있다 그녀의 슬픈 발에는 키 작은 운동화가 날마다 따라다니고 절인 배추가 되어 돌아온 운동화에선 고달픈 하루 냄새가 배어 나온다 신발장 문이 열릴 때마다 나 여기 있다고 들썩여 봤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그 납작한 운동화만 데리고 간다 땡고추 같은 쌀쌀함이 측은하기만 ..

가을 항(港)의 여름은

가을 항(港)의 여름은 임현숙  풍요로운 햇살 덕에하늘빛도채마밭도새파랗고고향을 떠나 뿌리내린 나도허릿살이 풍성해진다 생의 늦여름에 만났던낯선 땅 밴쿠버땡볕에도나무 그늘엔 만년설 바람 보송한소소한 풍경마저 그림엽서가 되는시퍼런 여름빛에 홀렸다 작은 포구에 영근 여름은 바라만 보아도 설레었는데돛단배 타고 하늘을 날던그 두근거림은 어디로 갔을까 누릇한 생의 가을 항(港)에서그리울 일도기다릴 이도막배에 태워 보내놓고선꽃이라 불리던 여름날 애련해뱃고동 소리 기다려진다 활짝 핀 여름 안에서그 설렘으로 가는 배표를 예매 중이다.   -림(20230626) https://www.youtube.com/watch?v=Pt_zuexXFdw&t=8s

달리아꽃 속엔

달리아꽃 속엔 임현숙 빨강, 노랑, 주황 푸짐한 달리아꽃 보름달만 한 얼굴은 울 엄마 다후다 이불 무늬 어린 시절 이부자리를 펴면 붉고 커다란 달리아꽃이 활짝 웃으며 어서 오라 했지 달리아꽃 품안에서 꿈꾸던 날은 멀리 갔어도 엄마 내음은 꽃잎마다 철철 젖어 저물녘 이 마음 두근거리네. -림(20131004) 보름달만 한 다알라아꽃을 보면 엄마 이불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이부자리를 펴면 푸짐하고 붉은 다알리아꽃이 활짝 웃고 있었다 촌스럽게 원색적이던 다후다 이불 세월이 흘러 이부자리도 고급스럽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변해 엄마의 이불은 시골 민박집에서도 보기 어려워졌다 길을 걷다 다알리아꽃을 보면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다가가 엄마 내음을 맡고 싶다

벗어나기

벗어나기 임현숙 내 머릿속 사고의 골목에 해결사 거미가 산다 얼기설기 둘러친 그물에 생각의 고리들이 포도알처럼 맺혀있다 거미는 포식하고 배불뚝이가 되어 골목 입구를 막고 잠들어 버렸다 더는 풀지 못하는 방정식이 되어가는 문제 문제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투사처럼 제발 풀어 달라고 아니 먹어달라고 흔들어 깨워도 탱탱볼 같은 배만 쓰다듬는다 풀이 기한이 지나버려 스스로 풀 수 없는 미적분 아득한 밤 미로를 헤맨다 찐득한 코피가 흐른다 거미줄이 끊어져 흘러나오는 강박의 잔해들 파랑새를 풀어놓아야겠다. -림(20230514)

꽃바람 깃들어

꽃바람 깃들어 임현숙 오월은 그 무엇이라도 벚꽃 같은 바람 깃드는 시절 날 찾아온 꽃바람 부끄러이 꿀꺽 삼키면 민들레처럼 번져오는 다정한 얼굴들 꽃이 핀다 사람이 핀다 내 그리운 어머니 목단꽃으로 살아나고 기억의 꽃송이 물오르고 다섯 살 손녀는 즐거운 참새 아련히 밀려오는 푸른 꽃향기에 할미꽃도 살짝궁 고개를 든다 애잔하구나 안아볼 수 없는 것들이여 사랑스러워라 오월의 사람이여 꽃바람 깃들면 하늘 저편도 하늘 이편도 모두가 푸른 꽃송이다. -림(20230501) 2023.05.13 밴조선 게재

세월 강가에서

세월 강가에서 임 현 숙 갈대숲을 지나는 바람처럼 흘러가는 세월 강물 벌거숭이 시절이 까마득한 바다로 가고 연분홍빛 꿈은 물거품이 되었네 꽃이 피고 지고 낙엽 구르고 눈 내리는 세월 강 굽이굽이 연어처럼 용솟음쳐 보지만 거스를 수 없는 잔인한 강물이여 이순 굽이 세월 강은 그리움 섧게 서린 늪 그 너머 물보라 이는 세월 강 하구에 다시금 물들 수 없는 빛깔 설렘의 쌍무지개 뜨고 어슴푸레한 기억에 기대어 철없이 벙글어지는 동백꽃 송이. -림(2023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