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 좋은 친구 임 현 숙 별이 졸려 까무러칠 때쯤 다중 인격을 갖은 친구, 컴퓨터를 재우고 커튼을 젖히면 코발트 빛 하늘 장막이 온 밤을 싸 안고 내 침실에 고요를 내린다 그제야 등을 끄고 허리를 편다 시계 소리 자장가 삼아 뒤척이다 깜박 눈을 뜨면 컴퓨터의 파란 눈이 유리창에 박혀있..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3.26
이따금 이따금 임 현 숙 똑딱 똑딱 메트로놈처럼 하루를 산다 똑딱 똑딱 시계추처럼 하루가 간다 이따금 뚜욱 딱 뚜우 딱 고장 난 시계 나라에 머물고 싶다. -림(20150307)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3.07
두물머리 미루나무 두물머리 미루나무 임 현 숙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사백여 년을 살아온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남 총각 북 처녀의 눈물이 만나 얼싸안는 것을 지켜보았고 세상 소풍을 끝낸 영혼의 껍데기가 먼지처럼 강물에 흩날리는 것도 연인들의 진한 사랑의 몸짓도 나뭇가지 사이..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3.06
허무(虛無) 허무(虛無) 임 현 숙 살가운 바람결에 꽃망울이 눈을 떴다 꽃이 바람에 물었다 사랑하느냐고 바람이 웃었다 머무는 만큼만 사랑한다고 꽃은 알지 못했다 바람이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림(20150304)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3.04
휴대폰 휴대폰 임 현 숙 휴대폰이 밥을 거부한다 두 해 넘게 곁에서 잠들고 손바닥에서 재잘거리더니 충전기를 목구멍 깊숙이 넣어도 잠잠하다 며칠 애걸복걸하다가 슬슬 부아가 치밀어 병원에 가니 수술보단 사망 선고를 권한다 그 없는 한 시간은 무인도에 홀로 남은 것 같아서 키 크고 힘 좋..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3.02
설날 아침에 설날 아침에 임 현 숙 올봄에도 내 어머니 누운 동산엔 흰 배꽃 향 비석을 닦고 종다리 지지배배 비문을 읽겠지 어머니와 영영 이별하고 돌아설 때 눈물을 훔치던 따스한 숨결 이토록 생생한 데 어언 이십여 년이 흘렀구나 어느 해 지붕에 아카시아가 자라나 목놓아 울며 종종 돌아보겠노..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2.19
사랑이란 사랑이란 임 현 숙 사랑할 땐 누구라도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곱게 치장한 베일 뒤에서 달콤한 혀로 애간장을 녹이곤 한다 애정이 싹트고 잎이 우거질 무렵이면 차도르 벗은 얼굴을 보게 되지 우리가 진정 사랑 한다면 화장은 하지 말아야 하리 곰보 째보면 어떠리 너를 사랑한다는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2.13
새벽비2 새벽비2 임 현 숙 유리창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 꿈결에 창을 여니 울컥울컥 쏟아지는 빗줄기 어느 누가 날 그리워 이토록 울먹이는가 새벽이 먼동 대신 눈물 젖은 연서를 가져 왔네. -림(20150208)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2.08
나 사는 동안 나 사는 동안 임 현 숙 지나온 길 돌아보니 감사한 일뿐입니다 힘든 일 미혹의 안개 드리운 이 세상에서 바른길 가며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시름으로 누운 자리 아침 햇살 찾아들면 눈부심이 경이로워 눈물이 납니다 오 내 주여 오 내 주여 이 모든 것 주님의 선물 이 모든 것 주님의 은..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2.05
그래도(島) 그래도(島) 임 현 숙 내 바다엔 '그래도(島)'라는 섬이 있다 '긍정'이라는 꽃과 '감사'라는 열매가 영그는 푸른 나무가 자란다 섬 한쪽 모퉁이 하지만(灣)'이라는 포구엔 통통배가 자주 드나들며 뿔난 생각을 부려놓는다 지쳤어, 고달파, 슬퍼…… '하지만(灣)'의 파도가 철썩철썩 다듬어 푸..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2.04
별에게 별에게 임 현 숙 나는 그리움의 강에 사는 은어 풍랑일 때마다 기억들이 아련히 밀려와 아가미가 뻐근하곤 해 밤하늘 별을 꼽아보던 올챙이 적 물풀 한 줄기 은하 별 하나 헤고 또 헤이며 풀 이파리 다 따먹어도 별 하나 가질 수 없어 지느러미만 흔들어댔지 긴 세월 흐른 후에야 별은 바..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1.29
시인이라면 시인이라면 임 현 숙 토스트 두 쪽, 땅콩 열 알 블랙커피 한 잔 간혹 사과 한 톨 곁들여 근사하게 아침을 들고 나면 종종 배부른 돼지가 된다 시인이라면 주리고 헐벗은 고뇌를 불태워 꿈꾸듯 시혼詩魂을 그려야 하건만 아마도 배가 불러 오늘도 시문詩文 언저리에서 귀동냥만 하나 보다.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1.24
동그라미, 네모, 세모 동그라미, 네모, 세모 임 현 숙 크리스마스 장식을 치우는 중 선물 주고받으며 나눈 이야기들이 톡톡 깨어나네 흐뭇한 풍경을 주워담으며 빈 껍데기를 치우고 나니 집안이 너른 마당 같네 갑갑한 마음도 정리하면 훤해질 텐데 동그라미, 네모, 세모 아무리 골라봐도 버릴 추억이 없네. -림..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1.20
내 나이 세어보니 내 나이 세어보니 임 현 숙 먼지 한 톨도 쓸고 닦아야 후련하고 자정 넘어 잠들어도 동 트기 전 일어나던 바지런함이 눕자 눕자 꼬드깁니다 아침에 먹는 알약을 먹었는지 아리송해 어느 날은 빼 먹고 어느 날은 또 먹어서 인제 먹고 나면 동그라미 칩니다 자식에게 떵떵거리던 목소리 기..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1.15
안개가 그리는 풍경 안개가 그리는 풍경 임 현 숙 짙은 안개는 암행어사이다 감찰이 깊어질수록 어수선한 세상은 먹통이 된다 굉음을 내며 오르내리던 자동차 눈 부라리며 오금 저리고 날랜 발길 굼벵이 된다 볼 꼬집던 바람 감쪽같이 숨어 버려 안개의 축축한 추궁만이 집요하다 날 속속들이 들여다보려 해..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1.09
새 달력에 바란다 새 달력에 바란다 임 현 숙 폭죽 소리 달려와 새날을 열며 내게로 네게로 복을 쏟아붓는다 등 따습고 배부르니 더 바라는 건 죄이지만 새 달력에 간절한 바람을 담는다 이방인의 멍에 벗고 가로등 소곤대는 서울 밤거리를 거침없이 모국어로 떠들며 걷고 싶다고 느림보 밴쿠버 시계 뺑뺑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1.05
양은 도시락의 추억 양은 도시락의 추억 임 현 숙 겨울이 오면 교실 조개탄 난로 위에 노란 도시락 탑이 쌓였지 양은 도시락 안에서 김치가 볶아지고 누룽지 냄새 코를 씰룩였어 난로 뒤에 앉은 친구는 수업 시간 내내 도시락 층 바꾸느라 바쁘고 이 교시 끝나는 종 울리기 무섭게 속전속결 하는 전투가 벌어..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1.05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임 현 숙 참 빛으로 오신 당신을 경배합니다 저마다 노래하는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의 은총이 부요의 옷을 걸친 자리에나 거리를 유리하는 자들에게나 흥건히 넘쳐납니다 빨강 초록의 현란한 불빛 사이에 나도 하양 촛불로 나란히 반짝이고 싶습니다 저만치 외진 곳에..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4.12.20
그 집, 그 맛 그대로 그 집, 그 맛 그대로 임 현 숙 몸살감기 일주일 째 자꾸 눕고 싶고 먹을거리만 생각난다 지금도 있으려나 몰라 '명동 할매 낙지볶음집' 사람이 겨우 비켜 지나가는 좁은 통로를 지나 열두어 명 앉으면 꽉 차는 초라한 식당이지만 줄 서서 기다려야만 먹을 수 있었다 주인장 주름살처럼 곱..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4.12.19
순전한 마음 순전한 마음 임 현 숙 잠잠한 자선냄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꼬마 눈웃음 어여삐 꼭 쥔 고사리손을 냄비 안에 펼친다 뎅그렁뎅그렁 탄일종을 울리는 따뜻한 동전 두 잎 하늘에 쌓는 순전한 향기 환히 웃는 아빠 눈 속에 가장 사랑스러운 별 하나 떠 있다. -림(20141219)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4.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