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돌 몽돌 임 현 숙 얼마나 구르고 굴러야 몽돌이 될까 아집에 할퀴고 억지에 피 흘리면서 맞서지 못하고 각만 키우는 돌멩이 저녁이면 이해의 정으로 모서리 돌돌 다듬어도 우락부락 부딪히면 조각나는 못난이 얼마큼 더 살아야 너그러워질까 베이고 찔려도 그저 허허 바보처럼. -림(20160615)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6.06.15
꼬들꼬들해지기 꼬들꼬들해지기 임 현 숙 산다는 건 세상과의 혈투이지 상처가 너무 아플 땐 어두운 골방에 숨어 피고름 흐를 때까지 눈물만 흘렸어 세상과 나 사이에 벽 하나 더 만들고 딱지가 앉아서야 골방을 나섰었네 벽이 늘어갈수록 상처는 아물지 않아 짓무른 악취에 기절하고서야 숨어 울면 세..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6.06.14
잊힌 기억일지라도 잊힌 기억일지라도 임 현 숙 쓰레기통 곁에 음료수 깡통이 찌그러져 울고 있다 불그스레한 눈물이 길을 적신다 더는 담을 수 없어 어딘가에 버린 내 옛 기억도 저렇게 서러움을 토하고 있을까 버려진다는 것은 더는 쓸모 없다는 것 잊힌다는 건 그립지 않다는 것 버림도 잊힘도 알알한 상..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6.03.14
안녕 안녕 임 현 숙 지인 아들의 부음은 홀로 살아 뒤늦게 발견된 주검 저승사자는 돌연히 어미 심장에 무덤을 팠다 더는 물을 수 없는 안녕 안녕…. 처음과 마지막 인사 딩동딩동 안부의 초인종 사랑과 나란히 늙어 가는 말 하여 오늘도 난 너에게 넌 나에게 초인종을 누른다 딩동딩동 거기 있..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6.01.16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임 현 숙 어서 오십시오 나목 사이로 솟아오르는 새날이여 고난의 장벽을 뛰어넘어 텅 빈 곳간에 금빛 햇살이 넘실거리게 하소서 저 북방 거센 바람으로 나이테 늘어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의 티끌을 키질하소서 웃음을 잃은 이에게 소망 박을 타게 하시고 사랑을 잃은 이의 눈물을 거두어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겸손의 신발을 신고 배려를 지팡이 삼아 무장무장 섬김의 길을 가게 하시고 내 모습 이대로 감사하며 날마다 행복의 샘물을 나누게 하소서 어서 오십시오 나목에 파릇한 옷을 지어줄 새날이여. -림(20151231)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12.31
섣달그믐 밤에 섣달그믐 밤에 임 현 숙 섣달그믐 돌아온 탕아처럼 예배실로 들어갔다 복음송도 새롭고 찬송가 가락도 변하고 따라 부르는 음성엔 뜨거움이 없었다 다시 돌아오기에 너무 멀어진 생명 시냇가 얼어붙은 심장이 가벼운 입술로 송구영신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밤눈이 하얗게 길을 덮고 있..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12.31
솔잎 향기따라 솔잎 향기따라 임 현 숙 오색 무희들 나비춤으로 가을의 연회는 막을 내렸네요 검은 선글라스 카메라 셔터 소리 먼 마을로 돌아가고 바람의 긴 수염 낙엽을 쓸어내면 이제야 눈에 드는 소박한 솔 이파리 칠면조 같은 나무들 들러리로 가을을 춤추게 하더니 꽃 지고 잎 진 앙상한 등성이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12.04
11월의 나무 11월의 나무 임 현 숙 11월의 나무는 공연을 마친 연극배우처럼 관객이 썰물 진 무대 붉은 조명등을 하나둘 끈다 붉은 기염을 토할 때마다 고막을 찢던 탄성 더욱 열연하던 이파리들도 박수받으며 퇴장한 후 못다 한 욕망의 갈색 등 바람의 밭은기침에 아슬아슬한 초침의 그네를 탄다 연륜..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11.25
11월의 우리 11월의 우리 임 현 숙 비어가는 11월 햇살이 짧은 그림자를 거두면 한 뼘 멀어진 나무와 나무 사이 바람이 밀고 당긴다 멀어진 만큼 따스함이 그리운 계절 바람 든 무속처럼 한여름 정오의 사랑이 지고 있으므로 슬퍼하지는 말자 꽃이 져야 씨앗이 영글 듯 우리 사랑도 가슴 깊은 곳에 단단..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11.13
어미의 마음 어미의 마음 임 현 숙 가을 나무에 아직 푸른 잎 붉게, 샛노랗게 물들고 있는 잎 벌써 바싹 마른 잎 한 뿌리에서 자라났어도 손가락처럼 다르다 바람이 불면 고운 이파리들 살랑살랑 왈츠를 추지만 벌벌 떠는 마른 이파리가 안쓰러워 가을 나무는 윙윙 운다 길고 짧은 내 분신들 자라다 만..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11.09
가을 아침에 가을 아침에 임 현 숙 흙빛 까칠한 가랑잎 연둣빛 흔적 자취 없고 발길에 채는 쓸쓸한 낭만 거울 속에서 아침마다 만나는 여자와 닮았다 오늘도 그 여자 마른 입술에 쓸쓸함이 엿보지 않게 갈바람이 티 나지 않게 살짝궁 불씨를 지핀다 봄처럼 피라고 단풍처럼 도도하라고 주문을 걸면 담..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10.23
그 추석이 그립구나 그 추석이 그립구나 임 현 숙 그 추석에는 언니 오빠 형부 시누이 다 모여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상을 물리고 나면 고스톱판이 벌어지곤 했다 슬쩍 잃어주며 흥을 돋우는 남편 서로 잘 못 친다고 탓하는 오빠와 형부 그 틈에서 "고"를 외치며 깔깔거리던 나 뒷손이 착착 잘 붙는 시누이 추..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9.28
가을의 편지 가을의 편지 임 현 숙 가을이 편지를 보내옵니다 낙엽 갈피에 갈바람으로 꾹꾹 눌러쓴 자국마다 어느 가을날의 추억이 도드라집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찢으며 돌아서던 날 단풍은 서럽게 붉었고 연민이 발뒤꿈치를 부여잡았습니다 사랑은 지독한 열병이라는 걸 가르쳐준 사람이지만 도..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9.23
그 무엇이라도 좋으리 그 무엇이라도 좋으리 임 현 숙 가을엔 무엇이 되어도 좋으리 들녘을 나는 한 줄기 바람 논두렁 밭두렁 가 널브러진 들꽃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 그 무엇이라도 감사하리 노랗게 빠알갛게 익어 가는 풍경 속에 저무는 노을이어도 행복하리 호흡 있음이 경이롭고 꽃이라 부르는 그대 있..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9.10
정전 정전 임 현 숙 정전되자 전기를 먹고 사는 것들이 모두 휴가 중 "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무기력하다 인터넷을 헤매던 마음이 길을 잃고 손전화를 주무르던 손가락엔 신경질이 돋아나고 초라한 허기는 불 켜진 식당으로 밀물처럼 몰려간다 전기 없는 하루가 어긋난 가위처럼 삐거덕거리..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9.05
뒷모습에 박인 그리움 뒷모습에 박인 그리움 임 현 숙 뒷모습이 쓸쓸한 사람은 수평선 너머에 그리움을 두고 온 사람이다 푸른 정맥에 흐르는 말간 피가 끈적해지는 동안 이 땅에 살아있도록 온기를 준 모든 것들을 잊지 못해 날마다 되새김질하는 사람이다 뒷모습이 젖어있는 사람은 다시 부둥켜안을 수 없는..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8.09
그 시간마저도 그립습니다 그 시간마저도 그립습니다 임 현 숙 멀리 고향을 떠나와 나처럼 외로운 건지 길섶에 옹기종기 살을 비비고 있는 조약돌들 비 내리는 날이면 빗물 따라가려 졸졸졸 거리지만 제자리에서 어깨만 들썩일 뿐 동해의 푸른 숨결 서해의 붉은 낙조 울안에 덩굴지던 능소화 마음 자락 별빛 헤며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7.11
유월 햇살 유월 햇살 임 현 숙 유월 아침 선잠에서 기어 나오면 앳된 햇살이 얼싸안는다 거저 누리는 이 행복 물은 쓰는 만큼 대가를 내라 하지만 햇살은 여태 고지서 한 장 보내지 않는다 여름이면 금빛 햇살 사치스럽게 걸치고 겨울이면 해쓱한 햇살 졸졸 따라다녀도 사나운 표정 지은 적 없이 나..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6.22
어떤 부부 어떤 부부 임 현 숙 멀리서 보아도 키 크고 멋진 남자 아담한 키에 미소가 예쁜 여자 두 사람은 부부이다 푸드코트 한 모퉁이 식당에서 날마다 삶과 투쟁을 한다 식자재 구매는 남자의 몫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게 자연스럽다 호박이 넘쳐나는데도 가격이 좋아 또 사오면 으레 지청구가..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6.04
가로등 가로등 임 현 숙 모두가 퇴근하는 시각 집을 나선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늘 같은 자리에 서서 침침한 눈으로 주위를 밝히며 습관처럼 발자국 소리를 매만진다 아직도 취직 못 한 일류대 졸업생의 처진 어깨 긴 그림자로 끌어안고 곤드레만드레 아저씨 발목 걱정스레 쏘아보며 고물 줍는 .. 나목의 글밭/시선(詩選)·시시껍절할지라도 2015.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