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집이 있었습니다 그런 집이 있었습니다 임 현 숙 길모퉁이 돌아 담쟁이 엉클어진 축대 높은 집 돌계단 올라서면 능소화 수북하던 담장 옆에 대추나무 유령처럼 서 있고 통나무 벤치 놓인 마당에 여름밤이면 오빠네랑 언니네랑 별빛 헤아리며 삼겹살에 술잔 기울이던 곳 겨울이면 남쪽으로 열린 창에 쏟아..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2.08
겨울 산에 눈이 내리면 겨울 산에 눈이 내리면 /안개비 임현숙 겨울 산에 눈이 내리면 벌거숭이 나무도 바람을 배웅하던 억새도 하얀 솜이불을 덮고 평온한 겨울잠에 빠져듭니다 바람이 머물다 간 가지엔 눈꽃이 피고 나무의 숨소리가 골짜기를 메워 산은 고즈넉한 침묵 속에 가라앉습니다 산 너머에 겨울 산처..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2.08
항아리에 담긴 그리움 항아리에 담긴 그리움 /안개비 임현숙 볕 좋은 날 장독대에 뚜껑 여는 소리 딸그락딸그락 들리면 우물처럼 고인 간장이 까만 눈동자를 빛내고 곰삭아 가는 된장은 은행잎을 닮아갔지 마음의 뜨락에 그리움 담긴 작은 항아리를 초겨울 볕에 열어놓아 바람을 들이니 오래 두고 맛있..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2.03
달력은 말없이 이야기한다 달력은 말없이 이야기한다 /안개비 임현숙 세상은 밤보다 짙은 안갯속에 묻혀 조용하고 하얀 벽 위에는 12라는 숫자 하나가 목매달려 거친 숨을 몰아쉰다 한 장씩 떨어져 나가던 시간이 어제와 똑같이 줄지어 있는데 유독 12라는 큰 글자가 눈을 찌르며 다가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2.02
내 그리움은 내 그리움은 /안개비 임현숙 내 그리움은 단풍잎이 붉게 물들어 갈 땐 알알이 영근 포도송이 그 밑에서 침 흘리는 여우 그 여우를 짖는 사냥개 두려워 숨는 빨간 망토 소녀 내 그리움은 바람이 마지막 나뭇잎을 흔들었을 땐 바다에서 노를 잃은 돛배 천둥을 동반한 폭우 등대를 찾..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30
누가 먼저 아침을 깨울까 누가 먼저 아침을 깨울까 /안개비 임현숙 하늘 끝이 발갛게 물들어 오면 먼저 아침을 깨우는 새들 텃새들은 체조하느라 하늘을 돌고 신호등 위에 까마귀는 바람이 흔들고 지나가도 식사 삼매경이다 육지 갈매기가 끼룩끼룩 자명종을 울려야 신호등 앞이 차들로 북적거리며 세상..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30
이제는 잠에서 깨어날 때 이제는 잠에서 깨어날 때 /안개비 임현숙 손끝이 떨리며 내 안에서 무엇인가 빠져나가는데 멈추지도 막을 수도 없다 깊은 호수에 가라앉아서도 숨은 쉬어지고 무심히 보내는 시간 속에 그곳에도 달이 뜨고 해가 떠오른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날 때 햇살의 가는 손가락을 깍지 끼고..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29
그땐 몰랐어요 그땐 몰랐어요 /안개비 임현숙 늦둥이 막내딸 철부지를 시집 보내 놓고 날마다 궁금해서 기다리셨지요 곰살궂지도 않은 딸이 뭐 그리 예쁘다고 어쩌다 친정에 오는 날은 쇠약한 몸으로 따뜻한 밥상을 차려내셨어요 시댁에서 알콩달콩 사느라 엄마는 안중에도 없다가 속상한 날이..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24
11월에 내리는 눈 11월에 내리는 눈 /안개비 임현숙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밤 무성 영화처럼 침묵이 흐르는 유리벽 뒤의 세상은 자동차의 빨간 꼬리등만이 살아 움직이고 적막의 소리가 윙윙거리는 방안에서 눈(雪)과 눈(眼)을 맞추는 고독한 시간 매일 걸려 오는 그의 안부 전화가 오늘따라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9
첫눈이 내려요 첫눈이 내려요 /안개비 임현숙 첫눈이 내려요 붉은 잎과 못다한 석별의 정을 나누며 가을이 펑펑 울고 있어요 호수 위에 분수도 하얗게 눈물을 쏟고 산마루도 하얀 소복을 입었어요 나무는 떨며 가을의 추억을 지워가는데 가슴 벽에 새긴 그대 이름은 더 깊이 파고들어 지울 수 없..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8
가슴으로 울었다 가슴으로 울었다 /안개비 임현숙 부앙 울리는 저음의 색소폰 소리 칠순의 오빠가 불어대는 곡조에 황혼이 깃들고 회한이 어려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힘겨운 날숨은 여생의 보람이요 꺼지지 않은 불꽃의 존재감인 것을 아우들이 알아주길 바랐을까 삐걱대는 음에 키득거리던 못난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8
시래기에서 본 희망 시래기에서 본 희망 /안개비 임현숙 배추밭이 비어 간다 떨어진 이파리들이 어지럽다 빈 밭에서 거둬들인 시래기가 겨울 양식이 되었던 시절 시래기 죽이 바닥이 나고 아쉬움에 빈 숟가락을 놓지 못하던 가난이 덕지덕지하던 시래기를 이젠 돈을 주고 사 먹는다 세월은 그렇게 풍..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8
고향의 맛 고향의 맛 임 현 숙 여름 밭에서 살 오른 무는 갈무리해서 동치미 되고 푸른 잎은 허리 묶여 처마 밑에서 누렇게 바람맞았지 함박눈 소복이 내려 읍내로 가는 차편 끊기면 등 굽은 시누이 버석거리는 시래기를 가마솥에 푹푹 삶아 국을 끓였어 구수한 냄새 담을 넘으면 눈치 없는 옆집 영..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5
마주앉아 도란거리고 싶은 날 마주앉아 도란거리고 싶은 날 /안개비 임현숙 새들이 둥지를 향해 날고 있다 기차의 경적 소리가 들리고 꾸역꾸역 사람을 토해내는 역 노란 이, 검은 이... 피부색은 달라도 일과는 똑같은 사람들 산다는 것은 목젖의 만족을 위한 것 한 번의 꿀꺽 삼키는 침보다 내뱉는 한숨이 더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4
이별보다 아픈 그리움 이별보다 아픈 그리움 /안개비 임현숙 달 속에도 별 빛에도 이별 보다 아픈 그리움이 총총합니다. 당신으로 흘린 눈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아침마다 두레박을 내립니다 오늘도 그리움을 타서 마시는 커피 잔에 그대가 아른거립니다. Nov.13,2011 Lim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3
그대에게 난 그대에게 난 /안개비 임현숙 그대 창가 아침 햇살이 될래요 환한 미소로 사르르 눈을 감기고 이마에 햇살 연지를 찍고 싶어요 그대 하루를 내리쬐는 햇볕이 될래요 힘든 일상을 지켜보며 등 뒤에서 따스하게 안아주고 싶어요 그대 가슴 헤집는 바람이 될래요 찬 바람에 옷깃을 여..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3
사랑은 늘 기다림이다. 사랑은 늘 기다림이다. /안개비 임현숙 팔순의 노모가 아들을 기다리느라 잠을 잊었다. 캄캄한 곳에서 의자에 기대어 괘종시계가 두 번을 울려도 꾸벅꾸벅 졸며 마냥 기다렸다. 며느리인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차마 앞서 나서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40에 낳은 아들을 홀로 키우시..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2
그리운 날의 편지(1) 그리운 날의 편지(1) /안개비 임현숙 날이 쌀쌀합니다 가을은 진한 여운을 남기고 세월 속으로 잠들어 갑니다 커피 향보다 낙엽 타는 냄새가 그리운 날이에요 머잖아 첫눈이 내리겠지요 함박눈 내리던 날, 당신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던 밤길을 기억합니다 두 볼이 빨갛게 상..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2
촛불 촛불 임현숙 외로워 밝힌 촛불 하나 따스한 그림 되었습니다 그리워 심지 돋운 촛불 하나 화석 되었습니다 촛불 한 자루에 누추한 단칸방 보석 상자 되었습니다. Nov.11,2011 Lim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1
깃털 같은 가벼움 깃털 같은 가벼움 /안개비 임현숙 가을 나무가 바람이 탐하고 지나간 욕망의 옷을 벗는다 듬성듬성 빈자리로 파란 하늘이 상큼하고 커피점 창가에 연인의 모습도 사랑스럽다 비움의 미학이다 아름다운 정점에서 버릴 줄도 아는 나무처럼 화려한 연회 복을 벗고 산다는 것은 욕심을 내려..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1.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