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게임 생사의 게임 나목 임현숙 화재 경보가 울린다 옆집 사람들의 황급한 발소리에도 24층 이 여자 여유롭다 오작동이 한 두 번인가 생명을 담보로 경보기와 게임을 한다 소방차 사이렌이 들리자 베란다로 나와 동향을 살피는데 전과 달리 소방관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전 재산인 지갑..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23
봄이 많이 컸어요 봄이 많이 컸어요 나목 임현숙 어머나, 봄이 뛰어노네요 며칠 전만 해도 아장아장 걷더니 분홍신 신고 온 동네를 돌고 있어요 놀이터에서 꼬맹이들이랑 미끄럼도 타고 엄마들 품에도 살짝 안겨보고 장바구니에도 폴짝 들어앉고 어머머, 오토바이 탄 미스터 김 목에서도 나풀거리네요 곧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20
잊힌 기억일지라도 잊힌 기억일지라도 나목 임현숙 쓰레기통 곁에 음료수 깡통이 찌그러져 울고 있다 불그스레한 눈물이 길을 적신다 더는 담을 수 없어 어딘가에 버린 내 옛 기억도 저렇게 서러움을 토하고 있을까 버려진다는 것은 더는 쓸모 없다는 것 잊힌다는 건 그립지 않다는 것 버림도 잊힘도 알알..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17
눈을 뜨니 새벽이었네 눈을 뜨니 새벽이었네 나목 임현숙 나 홀로 일어나 앉은 시간 길은 아직 눈 뜨지 않았고 하늘도 꿈길을 헤매고 있네 차가운 마룻바닥 낡은 방석에 무릎 꿇어 쥐나던 날들의 바람 세월이 흘러 의자에 앉아 두 손 모으며 흘리던 눈물 이제는 누워버린 새벽기도에 예배당 종소리도 울리지 않..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16
휴대폰 휴대폰 나목 임현숙 휴대폰이 밥을 거부한다 두 해 넘게 곁에서 잠들고 손바닥에서 재잘거리더니 충전기를 목구멍 깊숙이 넣어도 잠잠하다 며칠 애걸복걸하다가 슬슬 부아가 치밀어 병원에 가니 수술보단 사망 선고를 권한다 그 없는 한 시간은 무인도에 홀로 남은 것 같아서 키 크고 힘..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15
詩 詩 나목 임현숙 내로라하는 시 꽃이 피었다는 시의 주봉(主峰)은 얼마나 높을까 유럽의 하얀 지붕 융프라우나 저 티베트 승려를 거느린 히말라야쯤 되려나 꽃향기가 광야에 외치는 소리로 때론 너털웃음이나 아득한 그리움으로 미늘처럼 영혼을 낚는 날이면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위..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12
후후 후후 나목 임현숙 안마당에 봄이 내려왔어요 그냥 지나칠 줄 알았더니 산수유에 노랑나비처럼 앉았네요 봄은 천의 얼굴이에요 어제는 창백했는데 오늘은 노랗게 내일은 어떤 색일까 내 마음도 자꾸 푸르러지고 화사해져요 이러다 당신이 못 알아보면 어쩌지요 후후 -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11
봄이 오셨다고요 봄이 오셨다고요 나목 임현숙 어디서 오시길래 이리 더디 오셨나요 마당 한 모퉁이 철쭉꽃 분홍 저고리 초록 치마 어젯밤 살짝이 신방을 차렸군요 밤새 꽃나무들 수군수군 시샘에 잠 못 들어요 봄님이 누구시길래 밤마다 뒤척이게 하는가요 오늘 밤 풀잎이 소곤거리면 연분홍 설렘 별빛..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08
때로는 착각으로 때로는 착각으로 나목 임현숙 이따금 버스를 타면 어느 날은 자리를 양보받는데 몸은 냉큼 앉아버리지만 내 모습이 그리 보이나 싶어 마음이 침침하다 어느 날엔 허리가 앉고 싶다고 눈앞에 젊은이를 쏘아보지만 서서 가는 마음엔 백열등이 켜진다 청둥호박이 애호박으로 보인다는 확신..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04
고구마와 커피의 만남 고구마와 커피의 만남 나목 임현숙 신여성 커피와 만난 선머슴 고구마 방금 열탕에서 나와 뜨거운 몸 커피 향에 더 붉어졌네 토실토실한 속살 반쯤 들어내 놓고 감질나게 하는 고구마 만만찮은 커피 아가씨 내숭 떨지만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정 바야흐로 꽃 피는..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03
진달래 진달래 나목 임현숙 무장 무장 부푸는 그리움 무더기로 피웠습니다 화사한 봄 숨결에 부끄러움도 잊고 차마 못 한 말 꽃잎에 물들였습니다 당신, 모른 듯 아니 보셔도 지나는 길목에서 수줍어 수줍어 발그레 웃겠습니다. -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2.28
봄비에 젖으면 봄비에 젖으면 나목 임현숙 자박자박 봄비 내리는 길 지난겨울 찌꺼기 쓱쓱 지우는 빗방울 소리 흥겨워 발걸음도 춤을 추네 반 토막 난 지렁이 재생의 욕망이 몸부림치고 시냇가 버드나무 올올이 연둣빛 리본 달고 나 살아났노라 환호성 하네 늙수그레하던 세상 생명수에 젖어 젖어 기지..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2.21
여자의 눈빛으로 여자의 눈빛으로 나목 임현숙 잃어버린 봄을 쇼핑몰 진열장에서 찾았어 알록달록 치장하고 손님을 맞고 있었네 눈이 반짝이는 딸아이 나비 머리띠도 만져보고 귀걸이도 걸어보며 봄 단장을 하는 중 어느새 눈길은 또 옆 가게로 가 있네 봄엔 여자들의 눈빛이 바빠지나 봐. -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2.20
나도 꽃이 되려나 보다 나도 꽃이 되려나 보다 나목 임현숙 철철 흐르는 봄비의 몸부림이 꽃을 피우기 위한 열정이라면 오늘 그 비에 흠뻑 젖고 싶다 빗방울 머금은 꽃 떨기마다 곰삭은 이야기 담아 그대 즐기는 한 잔의 술이 되고 싶다 버석거리는 심장에 붉은 피 돌게 하는 뜨거움이 되고 싶다 어느새 나목 가..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2.16
시간 죽이기 시간 죽이기 나목 임현숙 푸새와 나무가 며칠 들이킨 빗물을 게워내듯 산책도 못하게 퍼붓는 비에 진저리가 날 즈음 번민의 싹이 넝쿨 지었다 냉철의 가위로 순을 자르고 잘라도 음지 식물이어서 숲을 이루고 긍정은 '조금만'을 기다리느라 초조하기만 하다 엉뚱한 지혜가 '조금만'을 앞..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2.15
봄이 오는 길목 봄이 오는 길목 나목 임현숙 하늘 파란 미소 따라 햇살은 반짝반짝 바람은 살랑 길 따라 마냥 걷고 싶은 날 공사장 망치 소리도 흥겨운 노래 두꺼운 옷을 벗어들고 걷는 사람 영역 표시하기 바쁜 견(犬)공들 틈새로 아물아물 피어나는 아지랑이 꽃 산마루에 쌓인 눈 후 불어 날리고 진달래..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2.11
봄소식 봄소식 나목 임현숙 해거름이면 행여 내일엔 소식 올까 바다 멀리 노을이 붉고 아침이면 파랗게 설레건만 봄빛에 두근두근 나뭇가지마다 벙그러지는데 내 봄은 어디쯤 오길래 움이 안 트는가 소식은 서편 하늘을 맴돌고 널 기다리다 지친 내 그림자만 기다랗게 목을 내밀고있네 -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2.09
차림표처럼 차림표처럼 나목 임현숙 은발의 부부가 차림표를 보고 있다 샐러드부터 갈비찜까지 부부의 연대표처럼 울긋불긋하다 파릇한 샐러드 연애 김밥처럼 한이불을 덮던 날부터 바삭바삭 고소한 치킨 신혼을 지나 콩나물 버섯 같은 아이들과 쓱쓱 싹싹 비빔밥 시절을 지나며 사는 맛을 알았고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2.06
새벽 비 새벽 비 나목 임현숙 유리창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 꿈결에 창을 여니 울컥울컥 쏟아지는 빗줄기 어느 누가 날 그리워 이토록 울먹이는가 새벽이 먼동 대신 축축한 연서를 가져 왔네. -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2.05
조금만… 조금만… 나목 임현숙 고등어조림이 끓고 있다 그가 다 되었냐고 묻는다 조금만 기다려요 조금만은 고등어 비린내가 무에 젖어드는 시간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따끈한 커피가 냉정해지는 시간 여름이 낙엽에 가을이라 전해주는 시간… 다중 성격이지만 금세 다가와 마침표를 찍는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