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몰랐어요 그땐 몰랐어요 임 현 숙 늦은 나이에 낳은 막내딸 키만 커다란 전봇대에 시집 보내 놓고 날마다 전화기 앞에 앉아 기다리셨지요 곰살궂지도 않은 딸이 뭐 그리 예쁘다고 친정 나들이 가던 날은 힘없는 다리 이끌고 부엌을 지키며 따뜻한 밥상 차려 내셨어요 신랑이랑 아가랑 시어머니랑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8.24
오늘 스친 그 바람이 오늘 스친 그 바람이 임 현 숙 풀잎을 스쳐 옷자락 매만지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먼 대양을 건너 산굽이를 돌아온 속삭임이 들리지 않니 오늘 스친 그 바람이 몇 날 며칠 전 그리운 임이 보내온 보고 싶다는 말임을 바람이 지난 후에야 뒤돌아보며 그렁그렁 눈물지어도 다시금 돌..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8.20
뒷모습에 박인 그리움 뒷모습에 박인 그리움 임 현 숙 뒷모습이 쓸쓸한 사람은 수평선 너머에 그리움을 두고 온 사람이다 푸른 정맥에 흐르는 말간 피가 끈적해지는 동안 이 땅에 살아있도록 온기를 준 모든 것들을 잊지 못해 날마다 되새김질하는 사람이다 뒷모습이 젖어있는 사람은 다시 부둥켜안을 수 없는..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8.13
어서 할머니가 되고프다 어서 할머니가 되고프다 임 현 숙 우윳빛 몰티즈 새끼 두 마리가 식구가 되었다 아직 똥오줌 못 가리는 철부지어서 온 가족이 유모처럼 시간을 쪼갠다 시간표대로 먹이를 주고 밖에서 용변을 누이고 안아주고 놀아주고 씻기고… 여느 사람보다 호강하니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은 참..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7.15
침묵 침묵 임 현 숙 너그러워 보이던 바다에 너울이 인다 다스리지 못한 감정이 이성을 제치고 창백한 입술 사이로 쏟아지며 그름은 없고 이유 있는 항변만 파고 드높다 차분히 쌓아가던 모래성 허물어지고 으르렁거리다 까치놀로 잠잠해지면 수화기에서 메일에서 카톡방에서 회색빛 거품이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6.29
몽돌 몽돌 임 현 숙 얼마나 구르고 굴러야 몽돌이 될까 아집에 할퀴고 억지에 피 흘리면서 맞서지 못하고 각만 키우는 돌멩이 저녁이면 이해의 정으로 모서리 돌돌 다듬어도 우락부락 부딪히면 조각나는 못난이 얼마큼 더 살아야 너그러워질까 베이고 찔려도 그저 허허 바보처럼. 2016.06.15. 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6.21
6월 어느 날 6월 어느 날 임 현 숙 햇살 우아한 6월 어느 날 들꽃 이쁜 길을 걷다 보면 저 길모퉁이 바스락 소리 내 동무일까 기다려지는데 청잣빛 하늘에 뽀얀 구름 꽃송이 쪼로로롱 찌르찌르 청아한 텃새 노래 수수한 꽃잎은 햇살 분단장 삼매경 바람은 풀잎 귀에 간지게 소곤소곤 내 발걸음도 안단..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6.18
두물머리 미루나무 두물머리 미루나무 임 현 숙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사백여 년을 살아온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남 총각 북 처녀의 눈물이 만나 얼싸안는 것을 지켜보았고 세상 소풍을 끝낸 영혼의 껍데기가 먼지처럼 강물에 흩날리는 것도 연인들의 진한 사랑의 몸짓도 나뭇가지 사이..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6.14
꼬들꼬들해지기 꼬들꼬들해지기 임 현 숙 산다는 건 세상과의 혈투이지 상처가 너무 아플 땐 어두운 골방에 숨어 피고름 흐를 때까지 눈물만 흘렸어 세상과 나 사이에 벽 하나 더 만들고 딱지가 앉아서야 골방을 나섰었네 벽이 늘어갈수록 상처는 아물지 않아 짓무른 악취에 기절하고서야 숨어 울면 세..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6.04
밤비1 밤비1 임 현 숙 밤비가 내린다 단거리 선수처럼 섬광을 거느리고 포효하며 달리는 굵은 종아리가 관능적이다 청춘은 머얼리 흘러왔건만 마음은 아직도 펄펄 끓는 마그마 온 밤 사무치게 추억을 끌어안는다 꿈길에서도 스치지 못하는 인연 저 빗발이라면 나란히 달려 절정의 새벽을 맞이..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5.31
섬에서 섬을 그리다 섬에서 섬을 그리다 나목 임현숙 물보라 하얗게 꽃 수놓으며 뱃길이 다다른 섬 고요가 푸르게 물들어 오월의 보드란 햇살과 찰랑찰랑 눈빛만 부벼댈뿐 섬사람들도 섬처럼 조용조용 웃는다 일상의 먼지를 깔깔 털어내어도 지긋이 그늘을 드리워주며 지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시간 회포를 채 못 풀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아리게 그려보는 가고 싶은 섬 낯선 섬에도 길이 있어 지나는 이와도 눈빛을 마주하건만 맞바라기 동백섬은 닿을 수 없어 바람 편에 종이학만 접어 보낸다. 2016.05.18 림/갈리아노 섬에서 섬에서 섬을 그리다 임 현 숙 물보라 하얗게 꽃 수놓으며 뱃길이 다다른 섬 고요가 푸르게 물들어 오월의 보드란 햇살과 찰랑찰랑 눈빛만 부벼댈뿐 섬사람들도 섬처럼 조용조용 웃는다 일상의 먼지를 깔깔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5.23
하늘을 고이고 살라 하지만 하늘을 고이고 살라 하지만 나목 임현숙 맑은 바람결에 흐르는 구름이 되는 아침 어제보다 그늘을 더 드리우는 나무 한 그루와 눈을 맞추면 내 말에 옳다 끄덕이기도 아니라고 살래살래 도리질하며 철부지 나를 가르칩니다 나뭇잎처럼 가벼이 흔들리지 말고 뿌리처럼 지긋하게 땅을 밀..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5.12
백수 놀이 백수 놀이 나목 임현숙 내 몸의 지체들이 쉬자- 놀자- 반기를 들어 사령탑인 머리가 지끈지끈 그래, 오늘은 백수 놀이다 음악과 뒹굴고 컴퓨터랑 놀다가 한숨 자고 일어나도 해가 중천 커피, 크루아상, 멜론까지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워 노래 삼매경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 머리에 ..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4.28
어떤 부부 어떤 부부 나목 임현숙 멀리서 보아도 키 크고 멋진 남자 아담한 키에 미소가 예쁜 여자 두 사람은 부부이다 푸드코트 한 모퉁이 식당에서 날마다 삶과 투쟁을 한다 식자재 구매는 남자의 몫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게 자연스럽다 호박이 넘쳐나는데도 가격이 좋아 또 사오면 으레 지청..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4.25
절실함이 헛꿈을 잉태하다 절실함이 헛꿈을 잉태하다 나목 임현숙 미루고 벼르던 치과 검진 진료대에서 치아 사진을 보니 언젠가 보았던 늙은 개가 떠오른다 하품하는 사이 드러나던 누렇게 금 가고 마모된 이빨들 그 사이로 고이던 찐득한 침 수십 년 동안 깨물고 씹었던 욕망의 결과는 무참했다 상앗빛 젊은 날..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4.16
충복(忠僕) 충복(忠僕) 나목 임현숙 오른 팔꿈치 인대가 병가(病暇)를 달라 하네 속 옷 고무줄은 일 년도 못 가 삭아지는데 오십 평생을 고분고분 시중들었으니 참 질기기도 하지 한 이틀 쉬라고 왼팔을 부렸더니 손등 핏줄을 살쾡이처럼 할퀴네 어눌한 것이 성깔은 있어 오른팔만 하려면 멀었지 뭐..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4.06
한 방(放) 한 방(放) 나목 임현숙 노동에 지친 팔다리 후끈 파스를 붙였더니 통증보다 화끈하게 아픔이 사라진다 머리도 지끈거려 진통제 한 알 먹고 나니 이마에서 짹짹거리던 참새떼들이 사르르 잠잠하다 파스 한 장 알약 한 방에 화하니 평화로운 세상 사랑, 그 처절한 외마디에 벚꽃처럼 폭발하..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4.04
사월 사월 나목 임현숙 사월은 거리마다 꽃들의 웃음소리 오일장 봄나물처럼 온통 파릇한 설렘 늙은 나무도 푸른 귀 쫑긋거리네 물빛 하늘엔 하얀 구름 수련처럼 피고 내 마음 황무지엔 꽃불 번지네 아, 사월에는 귀 닫고 눈 감고 마음의 고요를 빌고 싶네. -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4.01
배추흰나비의 꿈 배추흰나비의 꿈 나목 임현숙 화려한 부활의 꿈을 꾸었어요 고치 속에서 고운 나비 될 날 손가락 꼽으며 기다려온 봄 산들엔 봄꽃 깔깔거리는데 초라한 봄을 맞이하네요 고운 꽃가루 물들이면 화사한 나비 될까요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28
늘 내가 지고 마는 늘 내가 지고 마는 나목 임현숙 어둠이 먹물 같은 시간이면 홀로라는 사실이 서럽다 즐겨보던 드라마도 시큰둥하고 사이버도 표류하기 싫어 책을 펼쳐보지만 돋보기가 귀찮아 침대로 파고든다 아, 텅 빈 냉장고에 갇힌 듯 춥고 싸늘한 허기 낮에는 삶 밤엔 외로움으로 전쟁이다 이 악물.. 나목의 글밭/시1·조금만을 기다리며 2016.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