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날의 일기
임현숙
어제는
등 뒤로 저문 것들이 더부룩해
되새김질하곤 했기에
오늘 만나는 새날 앞에
맑은국 한 사발 정화수처럼 내어놓습니다
제야의 종소리 한울림마다 빌고 빌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숱한 바람들은
그 문장조차 희미해지고
빈손엔 미련만이 돌아앉아 있습니다
생의 여름은 저물어
이별에 익숙해져야 할
가을 빈 벌판에서
허옇게 서리 내린 머리 조아리며
작은 바람 뭉치 하나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새날에는
뒤돌아보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텃밭에 미운 가라지가 싹 트지 않게 하소서
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게 하소서
제야의 종소리를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미소 짓게 하소서
낡은 나무 계단처럼 삐그덕거리는 사연을
제야의 종소리에 둥 두웅 실어 보내며
첫사랑 같은 새날을
맨발로 마중합니다.
-림(2024 새해를 맞으며)
2024.1.5. 중앙일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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