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기다리는 행복/이해인

라포엠(bluenamok) 2016. 5. 28. 00:35

 






기다리는 행복/이해인






온 생애를 두고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수수한 옷차림의 기다림입니다

겨울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처럼
나의 언어를 익혀
내 복된 삶의 즙을 짜겠습니다

밀물이 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이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더 이상 먼 곳을 헤매지 마십시오

내가 길들인
기다리는 일상 속에 머무는 나
때로는 눈물 흘리며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오랜 나날
상처받고도 죽지 않는 기다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소임입니다.

 









꿈을 위한 변명  /이해인


아직 살아있기에
꿈을 꿀수있습니다

꿈꾸지 말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꿈이 많은 사람은
정신이 산만하다고
삶이 맑지 못한 때문이라고
단정 짓지 마세요

나는 매일
꿈을 꿉니다.

슬퍼도 기뻐도
아름다운 꿈
꿈은 그래도 삶이 됩니다.

꿈이 없는삶
삶이없는꿈은
얼마나 지루할까요?

죽으면 꿈이 없겠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꿈을 꾸고 싶습니다.
꿈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순간들/이해인
                 

마주한 친구의 얼굴 사이로
빛나는 노을 사이로,
해뜨는 아침 사이로
바람은 우리들 세계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메꾸며
빈자리에서 빈자리로 날아다닌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잡아 흔들며,
때로는 텅빈 운동장을 돌며
바람은 끊임 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운 바람을 볼 수 있으려면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함을
우리에게 끓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황홀한 고백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단추를 달듯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고 있는
나의 손등위에
배시시 웃고 있는 고운 햇살

오늘이라는 새옷 위에
나는 어떤 모양의 단추를 달까

산다는 일은
끊임없이 새 옷을 갈아 입어도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듯
평범한 일들의 연속이지

탄탄한 실을 바늘에 꿰어
하나의 단추를 달듯
제자리를 찾으며 살아야겠네

보는 이 없어도
함부로 살아 버릴 수 없는
나의 삶을 확인하며
단추를 다는 이 시간

그리 낯설던 행복이
가까이 웃고 있네 








장두건 화백작품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