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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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빵 치마

멜빵 치마 임현숙 내 유년의 옷은 늘 무릎 아래에서 치렁거렸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입어보았을 체크무늬 멜빵 치마 똑같은 옷을 입은 이웃 친구는 탱글탱글한 토마토 같은 무르팍이 방글거리는데 내 치마는 기도하는 수녀처럼 늘 엄숙했다 물려줄 동생도 없고 콩나물처럼 키가 자라서 엄마의 가계부에는 멋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치맛단도 무릎까지 올려 박았고 허리둘레도 가슴통만큼 넓혀 멜빵을 달았다 학교길에 친구랑 나란히 걸어가면 철부지 마음에 먹구름이 일기도 했다 그 시절 기억의 파노라마엔 다음 해에 그 멜빵 치마를 입은 장면이 없다 키보다 앞서간 바람기가 수녀 옷을 거부했을까 딸아이가 교복 치마를 돌돌 걷어 입으면 볼멘소리하다가도 유년의 치마가 떠올라 돌아서 웃었다 세월이 하 흘러 늙은 토마토 같은 무르팍이 ..

새날의 일기

새날의 일기 임현숙 어제는 등 뒤로 저문 것들이 더부룩해 되새김질하곤 했기에 오늘 만나는 새날 앞에 맑은국 한 사발 정화수처럼 내어놓습니다 제야의 종소리 한울림마다 빌고 빌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숱한 바람들은 그 문장조차 희미해지고 빈손엔 미련만이 돌아앉아 있습니다 생의 여름은 저물어 이별에 익숙해져야 할 가을 빈 벌판에서 허옇게 서리 내린 머리 조아리며 작은 바람 뭉치 하나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새날에는 뒤돌아보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텃밭에 미운 가라지가 싹 트지 않게 하소서 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게 하소서 제야의 종소리를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미소 짓게 하소서 낡은 나무 계단처럼 삐그덕거리는 사연을 제야의 종소리에 둥 두웅 실어 보내며 첫사랑 같은 새날을 맨발로 마중합니다...

가을날

시:가을날/임현숙 producing, singer: producer Gumin Choi(GU) https://youtu.be/hwpgtn0il-g?si=MFEim3RGUVhMEcVV 가을날 임현숙 하늘빛 깊어져 가로수 이파리 물들어가면 심연에 묻힌 것들이 명치끝에서 치오른다 단풍빛 눈빛이며 뒤돌아 선 가랑잎 사람 말씨 곱던 그녀랑 두레박으로 퍼올리고 싶다 다시 만난다면 봄날처럼 웃을 수 있을까 가을은 촉수를 흔들며 사냥감을 찾고 나무 빛깔에 스며들며 덜컥 가을의 포로가 되고 만다 냄비에선 김치찌개가 보글거리고 달님도 창문 안을 기웃거리는데. A Fall day Written by Hyeon Sook Lim When the sky color deepens, the leaves of the street tr..

그레이로 가는 중입니다

그레이로 가는 중입니다 임현숙 "엄마~ 염색 좀 해. 완전 할머니야!" 나 할머니 맞는데! 여섯 살백이 손녀 있잖아? "염색하시면 훨씬 젊어 보이실 텐데요." 지인의 말, 지당한 말입니다. 친정어머니를 닮아서인지 흰머리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어요. 한 달에 한 번 뿌리 염색하다가 이젠 이십 일이면 색칠해야 합니다. 눈 감았다 뜨면 한 달이 훅 지나가 버리는데 번거롭기도 하고 눈도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물들이기를 놓아버렸습니다. 어제는 손녀딸을 데리러 갔다가 선생님을 마주쳤어요. 서양 선생님이 저를 보더니 'Your hair is a nice color~'라고 하더군요. 오˙˙˙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용기를 얻었어요. 할머니면 어때요. 나이와 다정히 좀 더 멋있어질 그레이로 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