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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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날의 일기

새날의 일기 임현숙 어제는 등 뒤로 저문 것들이 더부룩해 되새김질하곤 했기에 오늘 만나는 새날 앞에 맑은국 한 사발 정화수처럼 내어놓습니다 제야의 종소리 한울림마다 빌고 빌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숱한 바람들은 그 문장조차 희미해지고 빈손엔 미련만이 돌아앉아 있습니다 생의 여름은 저물어 이별에 익숙해져야 할 가을 빈 벌판에서 허옇게 서리 내린 머리 조아리며 작은 바람 뭉치 하나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새날에는 뒤돌아보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텃밭에 미운 가라지가 싹 트지 않게 하소서 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게 하소서 제야의 종소리를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미소 짓게 하소서 낡은 나무 계단처럼 삐그덕거리는 사연을 제야의 종소리에 둥 두웅 실어 보내며 첫사랑 같은 새날을 맨발로 마중합니다...

가을날

시:가을날/임현숙 producing, singer: producer Gumin Choi(GU) https://youtu.be/hwpgtn0il-g?si=MFEim3RGUVhMEcVV 가을날 임현숙 하늘빛 깊어져 가로수 이파리 물들어가면 심연에 묻힌 것들이 명치끝에서 치오른다 단풍빛 눈빛이며 뒤돌아 선 가랑잎 사람 말씨 곱던 그녀랑 두레박으로 퍼올리고 싶다 다시 만난다면 봄날처럼 웃을 수 있을까 가을은 촉수를 흔들며 사냥감을 찾고 나무 빛깔에 스며들며 덜컥 가을의 포로가 되고 만다 냄비에선 김치찌개가 보글거리고 달님도 창문 안을 기웃거리는데. A Fall day Written by Hyeon Sook Lim When the sky color deepens, the leaves of the street tr..

그레이로 가는 중입니다

그레이로 가는 중입니다 임현숙 "엄마~ 염색 좀 해. 완전 할머니야!" 나 할머니 맞는데! 여섯 살백이 손녀 있잖아? "염색하시면 훨씬 젊어 보이실 텐데요." 지인의 말, 지당한 말입니다. 친정어머니를 닮아서인지 흰머리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어요. 한 달에 한 번 뿌리 염색하다가 이젠 이십 일이면 색칠해야 합니다. 눈 감았다 뜨면 한 달이 훅 지나가 버리는데 번거롭기도 하고 눈도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물들이기를 놓아버렸습니다. 어제는 손녀딸을 데리러 갔다가 선생님을 마주쳤어요. 서양 선생님이 저를 보더니 'Your hair is a nice color~'라고 하더군요. 오˙˙˙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용기를 얻었어요. 할머니면 어때요. 나이와 다정히 좀 더 멋있어질 그레이로 가는 중입니다...

어둠의 스토킹

어둠의 스토킹 임현숙 불면의 밤 위로 짙은 어둠이 내린다 잠들지 못한 채 어둠을 응시하는 오감 어둠은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큰 입으로 잠들지 못하는 한 영혼을 데려가려 한다 피하면 피할수록 집요하게 따라오는 검은 입술 물러가기를 애원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는 어둠의 스토킹 불을 켜자 창문 밖으로 몸을 숨기는 어둠을 가자미 눈초리로 노려보다 불 끄고 눈감기를 열 번을 더해보아도 더 놀자 더 놀자 지치지 않는 뇌세포들 어둠의 칙칙한 입맞춤을 거부하지 못해 알약 하나를 삼키고 눈을 감으면 깊이 모를 어둠의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숨소리는 쇳소리를 내고 발끝까지 어둠 보에 싸여 시체가 되어간다 컹컹 옆집 개 짖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기상 알람 소리 아침이 오는데 ··· -림(20240202)

새로운 시작/브런치스토리(brunchstory)를 시작하며

나목의 브런치스토리 (brunch.co.kr) 나목의 브런치스토리 밴쿠버지부 시인 | 나목 임현숙 시인의 브런치스토리입니다. brunch.co.kr 새로운 시작/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하며 하루가 자전거처럼 달려간다. 일주일이 자동차처럼 달려간다. 한 달, 일 년이 비행기처럼 날아가 버린다. 내게 남은 시간이 점점 짧아져 간다. 아직도 하고 싶은 말 지금도 달려오는 추억 시와의 사랑에 목마른 나는 새로운 세상에 첫발걸음을 내디딘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 징검돌이 되고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 /나목

추억의 불씨

추억의 불씨 임현숙 하늘이 무너질 듯 겨울비 쏟아져 인적 드문 거리에 물빛 출렁이고 빗방울 소야곡에 시들은 마음 기대면 저문 기억들이 유령처럼 다가온다 창백한 낮달 같은 첫사랑 풋사랑 시작도 없이 엇갈린 이별 말없이 바라보던 그 눈빛을 그때는 어수룩해 읽지 못했노라고 빗살 머리채로 지워질 편지를 쓰고 또 쓴다 그 눈빛 닮은 노을꽃 피는 어느 쓸쓸한 저녁 따스한 불빛으로 켜지기를 겨울비는 늙지도 않는 추억의 불씨를 화르르르 지피고 돌꽃이 된 닿을 수 없는 인연의 고리 굵은 빗살에 걸어본다. -림(20240121)

2023년 제8호 밴쿠버문학 수록

섣달그믐 밤에 섣달그믐 돌아온 탕아처럼 예배실로 들어갔다 복음송도 새롭고 찬송가 가락도 변하고 따라 부르는 음성엔 뜨거움이 없었다 다시 돌아오기에 너무 멀어진 생명 시냇가 얼어붙은 심장이 가벼운 입술로 송구영신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밤눈이 하얗게 길을 덮고 있었다 새해라는 백지 위에 회개의 첫 발자국 선명하게 찍으라는 듯 따라오며 주홍빛 그림자를 자꾸 지우고 있었다. -림(20151231) 그래요 저 위에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실 때 그분만이 아는 예치금이 담긴 통장 하나 목숨에 붙여 주셨어요 찾기 싫어도 날마다 줄어드는 통장인데요 건강이라는 이자가 붙어 조금 불어나긴 해요 건강하게 살려면 이렇게 하라 이걸 먹어라 눈으로 귀로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세상만사가 나는 예외란 듯 맘 내키는 대로 살아왔지요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