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 김사인 여름날 /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7
허공장경虛空藏經 / 김사인 허공장경虛空藏經 / 김사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한 뒤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 결혼을 하자 더욱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떨어먹고 도로 서울로 와 다시 공사판 급성신부전이라 했다 삼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고 두 달 밀린 외..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7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7
그림자가 없다 / 김사인 그림자가 없다 / 김사인 내 곁의 여자는 손거울을 꺼내 루즈를 바른다. 맞은편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그물스타킹 발을 벗어 구두 위에 얹고 조는 동안, 그 곁 검정 배바지의 50대는 다리를 턱 벌리고 오가는 사람을 아래 위로 훑는다. 손잡이에 매달려 통화에 빨려든 젊은 여성은 배꼽과 허..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7
빈 방 / 김사인 빈 방 / 김사인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왔나 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별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6
지상의 방 한칸 / 김사인 지상의 방 한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6
고향의 누님 / 김사인 고향의 누님 / 김사인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 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 뿐 주인 잃은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 덩어리처럼 올망졸..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6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6
노숙 / 김사인 노숙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6
김사인 시모음 노숙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6
달팽이 (외 3편)-김사인 달팽이 (외 3편)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5.01.16
당신과 나의 겨울 당신과 나의 겨울 혜원 박영배 우리의 겨울이 있기까지 봄날에는 꽃을 피우기 위한 몸살로 눈물짓던 아픔이 많았습니다 서로 멀리서 가슴 조아리며 밤하늘 은하수 따라 흐르고 흘러 모진 가시밭길을 수없이 걸었네요 하루가 멀다고 주고받는 마음에 안개가 자욱하면 갈 길이 더디고 바..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12.12
깊어간다는 것 깊어간다는 것 혜원 박영배 말 없는 시간들이 앞다투어 사라진 길목, 창밖 서성이는 바람 한 점에도 당신 모습 묻어있을까 오늘도 가을을 붙들고 어스름 저녁 길을 나섭니다 그동안 주고받은 언어들이 소중한 인연으로 쌓여 가슴의 길을 얼마나 달려왔는지 저렇게 스러지는 나뭇잎마다 ..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11.04
당신/김용택, 들국화/나태주 당 신 - 김용택 작은 찻잔을 떠돌던 노오란 산국(山菊)향이 아직도 목젖을 간질입니다. 마당 끝을 적시던 호수의 잔 물결이 붉게 물들어 그대 마음 가장자리를 살짝 건드렸지요. 지금도 식지않은 꽃향이 가슴 언저리에서 맴돕니다. 모르겠어요. 온 몸에서 번지는 이 향(香)이 山菊 내음인..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10.11
가을사랑-도종환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읍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10.09
구절초 꽃-김용택 구절초 꽃/ 김용택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그늘을 따라서 걷다 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 해가 다 저문..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10.08
단풍드는 날-도종환 단풍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09.18
구월 구월 혜원 박영배 언젠가 당신이 달빛으로 다녀간 마음 한구석 소슬바람에 생채기가 덧나 속앓이가 생겼습니다 밤마다 저며오는 고요, 이슬의 숨소리를 들으며 뒤척이는 마른 잎사귀들 몸을 감춘 산 그림자 당신 닮은 어둠은 눈물 꽃으로 활짝 피어나 악성 류머티스 같은 생채기에 나는 ..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08.30
사연 - 도종환 사연 - 도종환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08.27
바람이 오면 -도종환 바람이 오면 -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가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 ...Sarah McLachlan - I Love You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2014.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