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나물 한 바구니(남)

김사인 시모음

라포엠(bluenamok) 2015. 1. 16. 21:13
노숙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2005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 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연전에 작고한 이성선 시인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고향의 누님 / 김사인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 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 뿐
주인 잃은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 덩어리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 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 넝쿨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들 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 오고 있나요.

 

 

 

상의 한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공휴일 / 김사인  

 

 

중량교 난간에 비슬막히 세워 놓고
사내 하나 가족사진을 찍는데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비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하나 들춰 업은 촌스러운 마누라는
생전에 처음 일 쑥쓰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이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착 붙어서
학교서 배운 대로 차렷 하고
눈만 떼굴떼굴 숨죽이고 섰는데
저런, 큰애 곁 다릿발 틈으로
웬 코스모스 하나 비죽이 내다보네
짐을 맡아 들고 장모인지 시어머니인지는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빈 방 / 김사인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왔나 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별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같이
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중에서 『창비시선』>

 

 

 

그림자가 없다 / 김사인

 

 

  내 곁의 여자는 손거울을 꺼내 루즈를 바른다. 맞은편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그물스타킹 발을 벗어 구두 위에 얹고 조는 동안, 그 곁 검정 배바지의 50대는 다리를 턱 벌리고 오가는 사람을 아래 위로 훑는다. 손잡이에 매달려 통화에 빨려든 젊은 여성은 배꼽과 허리만 남긴 채 이미 이곳에 없고, 그 앞에서 발을 떨며 문자메세지를 찍어대는 노랑 머리 대학생의 구멍난 청바지 틈엔 허연 살이 아프다.
 

  다들 고향에는 윗대 산소며 큰집 작은집이며 논둑길이며 앞산 밑 개울도 있던, 봄이면 우물가로 앵두꽃도 한철이던, 할아버지는 사랑에서 에에-퉤 하고 위엄있게 가래침도 뱉던 집 자손들이다.


  어디서 또 만나겠는가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가 없으니.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문학사상 (2007년 2월호)  

 

 

 

허공장경虛空藏經 / 김사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한 뒤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
결혼을 하자 더욱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떨어먹고 도로 서울로 와
다시 공사판
급성신부전이라 했다
삼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고
두 달 밀린 외상 쌀값 뒤로
무허가 철거장이 날아왔다
산으로 가 목장을 맸다
내려앉을 땅은 없어
재 한 줌으로 다시 허공에 뿌려졌다
나이 마흔둘.


월간『현대시학』 2006년 3월호 발표

 

 

 

/ 김사인

 


거센 바람 속에
새가 난다
날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파득이는
저 혼신의 날개짓이
넒은 강
건널까
저 거센 힘과 파닥임 사이
아슬한 균형 박차고
기어이 날아갈까
날아
못가고 몸 솟구쳐 이름없는 새
오른다
바람의 숨막히는 쇠그물의 끝을 향해 작은 새
피묻어 오른다
유연한 포물선 아니라
예리한 비수로 파랗게 날 서
수직으로, 온몸을 던져 수직으로
솟구쳐
바람의 멱통을 쪼아, 쪼아
피투성이 육신을
쪼아
살아
건널까 작은 새
죽음의 바람을 뚫고 넓은 강
몸은 벗어 장사지내도 그 예민한 부리
살아 건널까
저 새
기어이
 


 
여름날 /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강으로 가서 꽃이여 / 김사인

 


이마에 손을 얹고 꽃이여
이마에 여윈 손 얹고 꽃이여


어둡게 흘러가는 강가로 가자
어린 자갈들은 추위에 입술 파랗고
늙은 여뀌떼 거친 종아리

강으로 가서 우리는
강으로 가서
다만 강물을 보자


하늘엔 찬 별도 총총하리
시든 풀의 굽은 등엔 서리가 희리


취한 듯 슬픔인 듯 강으로 가서
다만 묵묵히 강물을 보자
이마에 손 얹고 꽃이여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작과비평, 2006) 중에서

 

 

 

귀가 / 김사인  

 

 

자동차 굉음 속
도시고속도로 갓길을
누런 개 한 마리가 끝없이 따라가고 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말린 꼬리 밑으로 비치는
그의 붉은 항문  

 

 

 

/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늦가을

                          김사인

 

그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 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 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봄밤

 

                                                         김사인
 

 
 나 죽으면 부조돈 오마넌은 내야 도ㅑ 형, 요새 삼마넌짜리도 많던데 그래두 나한테는 형은 오마넌은 내야 도ㅑ알았지 하고 노가다 이아무개(47세)가 수화기 너머에서 홍시냄새로 출렁거리는 봄밤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때 먹어야 되는디,시인 박아무개(47세)가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며 점잖은 식장 복판까지 쳐들어와 비닐봉다리를 쥐어주고는 우리 뽀뽀나 하자고, 뽀뽀를 한 번 하자고 꺼멓게 술에 탄 얼굴을 들이대는 봄밤이다
 
 좌간 우리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야 혀 자슥들아 하며 용봉탕집 장사장(51세)이 일단 애국가를 불러제끼자,하이고 우리집서 이렇게 훌륭한 노래 들어보기는 츰이네유 해쌓며 푼수 주모(50세)가 빈 자리 남은 술까지 들고 와 연신 부어대는 봄밤이다.
 
 십이마넌인데 십마넌만 내세유, 해서 그래두 되까유하며 지갑들 뒤지다 결국 오마넌은 외상을 달아놓고, 그래도 딱 한 잔만 더, 하고 검지를 세워 흔들며 포장마차로 소매를 서로 끄는 봄밤이다
 
 죽음마저 발갛게 열꽃이 피어
 강아무개 김아무개 오아무개는 먼저 떠났고
 차라리 저 남쪽 갯가 어디로 흘러가
 칠칠치 못한 목련같이 나도 시부적시부적 떨어나졌으면 싶은
 
 이래저래 한 오마넌은
 더 있어야 쓰겠는 밤이다

 

 

새벽별을 보며 - (청주의 도종환형께)

                                         김사인

서울에서 보는 별은 흐리기만 합니다
술에 취해 들어와
그래도 흩어지는 정신 수습해
변변찮은 일감이나마 잡고 밤을 샙니다
눈은 때꾼하지만 머리는 맑아져 창 밖으로 나서면
새벽별 하나
저도 한 잠 못 붙인 피로한 눈으로
나를 건너다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래 서로 기다려온 사람처럼
말없이 마주 봅니다
살기에 지쳐 저는 많은 걸 잃었습니다
잃은 만큼 또 다른 것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대도 시골 그곳에서 저 별을 보며
고단한 얼굴 문지르고 계신지요

부질없을지라도
먼 데서 반짝이는 별은 눈물겹고
이 새벽에
별 하나가 그대와 나를 향해 깨어 있으니
우리 서 있는 곳 어디쯤이며
또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저 별을 보면 알 듯 합니다
딴엔 알 듯도 합니다

 

 

새벽별

 

                                               도종환

새벽 하늘에 돌아가지 못한 별 하나 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가장 고요해지는 때를 기다려
우리들 가장 가까운 곳까지 내려온 별인지도 모르지요.
오손도손 사랑하고 가슴 아파도 하는 얘기에 귀기울이다
모두들 소리도 발자국도 없이 돌아갈 때에
너무도 가까이 내려와 오래오래 혼자 눈물짓다가
돌아가는 시간이 길어진 별인지도 모르지요.
남들보다 늦게까지 한 사람을 사랑하던 마음인지도 모르지요


 

 

깊이묻다

 

                        김사인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깊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네거리에서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손 뻗쳐도 뻗쳐도
와닿는 것은 허전한 바람, 한 줌 바람
그래도 팔 벌리고 애끓어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살 닿는 안타까움인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
돌아가 어둠 속
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
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 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
무심히 떨어지는 갈잎 하나인지도 몰라

그러나 또 무엇일까
고개돌려도 솟구쳐 오르는 울음같은 이것
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

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
칼바람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
무엇일까


달팽이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 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 년 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지고
길은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그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달팽이는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 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 순간,
이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 때가 비로서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 년 쯤
아니라면 석 달 열흘 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그 어느 생애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지상의 방 한 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봄밤 

나 죽으면 부조돈 오마넌은 내야 돼 형, 요새는
삼마넌짜리도 많던데 그래두 나한테는 오마넌은 내야 돼
알었지 하고 노가다 이아무개(47세)가 수화기 너머에서
홍시 냄새로 출렁이는 봄밤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때 먹어야 되는디,
시인 박아무개(47세)가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며
점잖은 식장 복판까지 쳐들어와 비닐 봉다리를 쥐어주고는
우리 뽀뽀나 하자고, 뽀뽀를 한번 하자고
꺼멓게 술에 탄 얼굴을 들이미는 봄밤이다.

좌간 우리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야여 자슥들아 하며
용봉탕집 장 사장(51세)이 일단 애국가부터 불러제끼자,
하이고 우리집서 이렇게 훌륭한 노래 들어보기는
츰이네유 해싸며 푼수 주모(50세)가
빈자리 남은 술까지 들고 와 연신 부어대는 봄밤이다.

십이마넌인데 십마넌만 내세유, 해서 그래두 되까유 하며
지갑을 뒤지다 결국 오마넌은 외상을 달아놓고, 그래도
딱 한 잔만 더, 하고 검지를 세워 흔들며 포장마차로
소매를 서로 끄는 봄밤이다.

죽음마저 발갛게 열꽃이 피어
강아무개 김아무개 오아무개는 먼저 떠났고
차라리 저 남쪽 갯가 어디로 흘러가
칠칠치못한 목련같이 나도
시부적 시부적 떨어나졌으면 싶은

이래저래 한 오마넌은
더 있어야 쓰겠는 밤이다.


코스모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치욕의 기억

영화배우 전지현을 닮은 처녀가 환하게 온다 발랄무쌍
목발을 짚고 (다만 목발을 짚고) 스커트에 하이힐 스카프
는 옥빛 하늘도 쾌청 그런데 (뭔지 생소하다 그런데)

오른쪽 하이힐이 없다
오른쪽 스타킹이 없다
오른쪽 종아리가 무릎이 허벅지가 없다

나는 스쳐 지나간다
돌아보지 못한다

묻건데
이러고도 生은 싸가지가 있는 것이냐!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여름날

풀들이 시드렁 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 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때늦은 사랑

내 하늘 한켠에 오래 머물다
새 하나
떠난다
힘없이 구부려 모았을
붉은 발가락들
흰 이마
세상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단정한 글씨 같다
하늘이 휑뎅그렁 비었구나
뒤축 무너진 헌 구두나 끌고
나는 또 쓸데없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


오누이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옛일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서걱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 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