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지면·너른 세상으로

2023년 제8호 밴쿠버문학 수록

라포엠(bluenamok) 2024. 1. 20. 07:13

 

섣달그믐 밤에

 

 

섣달그믐

돌아온 탕아처럼 예배실로 들어갔다

복음송도 새롭고

찬송가 가락도 변하고

따라 부르는 음성엔 뜨거움이 없었다

다시 돌아오기에 너무 멀어진

생명 시냇가

얼어붙은 심장이

가벼운 입술로

송구영신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밤눈이 하얗게 길을 덮고 있었다

새해라는 백지 위에

회개의 첫 발자국

선명하게 찍으라는 듯

따라오며

주홍빛 그림자를 자꾸 지우고 있었다.

 

 

-림(20151231)

 

 

 

 

 

그래요

 

 

 

저 위에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실 때

그분만이 아는 예치금이 담긴 통장 하나 목숨에 붙여 주셨어요

찾기 싫어도 날마다 줄어드는 통장인데요

건강이라는 이자가 붙어 조금 불어나긴 해요

 

건강하게 살려면 이렇게 하라 이걸 먹어라

눈으로 귀로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세상만사가 나는 예외란 듯 맘 내키는 대로 살아왔지요

 

나무 한 그루도 잘 돌보지 않으면 푸른 이파리 벌레 먹고 갈변하듯이

환갑, 진갑 다 지나온 지금 안일하게 살아온 대가를 치르는 중이에요

쭈그렁바가지 삼 년 간다며 골골해도 오래 살라던 시어머니

팔십 오수를 누리다 하늘로 가셨는데

내 통장 잔고는 얼마나 남아있을까요

생일을 맞을 때마다 예금통장을 열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해요

 

여름을 지나며 옷 서랍을 정리하는데

입지 않고 그냥 낡고 있는 옷들 위로 올해 산 옷들이 거드름 피우고 있어요

번쩍 꾸짖는 소리 섬광처럼 스쳐요

'살아온 세월보다 남은 시간이 더 짧단다.'

 

그래요

먹물 같던 머리 하얀 서리꽃 밭이니

무언가를 더 장만하기보단 하나씩 버리고 정리하는 습관을 들여야겠어요

그 어느 날 느닷없이 잔고가 영이 된다고 해도 가뿐히 날아갈 수 있게요

그런데요

잔액을 알면 더 열심히 살지 않을까요

하나님,

아주 잠깐만 통장 잔액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림(20220920)

 

 

 

 

 

저어기 아롱거리는

 

 

 

봄,

이 봄은 상냥하기도 하지

고목에도 새 이파리 돋아나네

 

꽃바람 미끄러지며

연두 꽃망울 너울대고

아지랑이처럼 추억이 피네

 

낡아 깁고 덧댄 기억들

나그네 긴 여정에

낙타의 두 혹 같은 것

 

새봄이 찾아와도

두근거리지 않을

화석으로 남아

풀잎 꽃 낙엽 눈···

사철 피어나는 돌꽃이어라

 

그래

오랜 추억은 기억일 뿐

이 봄엔 푸른 향기를 그리워하자

기억 저어편 그것 말고

저어기 아롱거리는 신기루 같은.

 

 

-림(20220310)





입춘이라네

 

 

 

저기 배나무 마지막 잎새는

여태 지난여름 빛인데

아이고나

입춘이란다

맹랑한 코비드 해일에도

세월은 씩씩하게 제 할 일하네

 

나이 탓일까

아니

시절 탓일까

이 적막한 밤 그만 꿈길을 잃었네

 

어려서처럼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천 마리를 세며 이불과 씨름하다

설핏 꿈길에 접어드는데

처지는 눈꺼풀과 어깨를 얄밉게 툭 치는

먼동의 붉은 손바닥

 

제 아무리 코비드 파고가 높아도

진달래 개나리 산야를 수놓을 텐데

다시 만난 봄날

큰 하품 진군 나팔처럼 불며 일어나야 하겠네

언 땅 열고 피어나는 복수초처럼

몇 겁을 살아도 죽지 않는 세월처럼

도도히

 

오늘 또 오늘

매일이 입춘이라네.



-림(2021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