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숲 속의 비망록

라포엠(bluenamok) 2014. 6. 6. 01:50

 

 

 

 

 

숲 속의 비망록-문정희

 

 

 

여름 숲 속 창작 교실에 갔다가

그만 폭우에 갇히고 말았다

외딴 흙 집 알전구에 매달려

박쥐와 함께 온 밤을 퍼덕이었다

충혈된 짐승털 냄새를 풍기며

폭우가 밤새 달려들었다

이윽고 안개가 베일을 벗자

어디서 걸어왔는지

희뿌연 아침이 이마를 드러냈다

풀들이 젖은 무릎으로

다시 떠오르는 해를 기적처럼 바라보았다

한 소년이 방문을 두드렸다

토란 잎 세숫대야에 맑은 물 채워들고

그 위에 은방울꽃 띄워놓고

어서 세수를 하라고 했다

풋풋한 시구가 첫사랑처럼 피어나는

여름 숲 속의 세숫대야 속으로

불현 듯 초록산 하나가 크게 팔을 벌리더니

숨막히게 나의 입술을 빼앗아버렸다

 

 

 

 

 


'시인의 향기 > 바다 한 접시(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은 얼마나 멀리서  (0) 2014.08.07
첫 만남/문정희(릴케를 위한 연가)  (0) 2014.07.30
유리창을 닦으며  (0) 2014.05.31
알몸의 시간  (0) 2014.05.29
달팽이  (0) 2014.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