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알몸의 시간

라포엠(bluenamok) 2014. 5. 29. 01:47

 

 

 

 

 

 

 

 

알몸의 시간-문정희

 

 

 

 

옷 한 벌 사려고 상가를 돌았다

내게 맞는 옷은 좀 체 없었다

조금 크거나 작거나 디자인이 맘에 안 들었다

세상의 옷들은 공주나 말라깽이

배우들을 위한 것뿐이었다

옷들은 대뜸 뚱뚱한 내 몸매부터 비웃었다

슬며시 부아가 나서

한 번 입어나 보려고 다리를 넣었다가

으드득! 소리를 내는 바람에

마치 성추행을 하려다 들킨 것처럼

얼른 밀쳐버렸다

 

상가를 빠져나오며

모처럼 하늘에 감사했다

군살은 완충 스펀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신의 배려

모든 옷이 몸에 맞는다면 그건 재앙이다

 

과일 가게에서 붉고 둥근 얼굴로 서성대다가

그만 야채로 분류된 토마토처럼

총총히 마굴 같은 상가를 무사히 벗어났다

 

생애에 한번쯤 꿈꾸는 사랑처럼

눈부신 옷을 꼭 한 벌쯤 입고 싶었지만

어쩌면 알몸의 시간이

먼저 올 것 같은 예감에

발걸음이 조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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