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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 창작의 비법은 없다 - 사고를 깊고 풍부하게 하라 /박재삼

라포엠(bluenamok) 2012. 10. 2. 00:15

 

(2) 시 창작의 비법은 없다 - 사고를 깊고 풍부하게 하라 - 박재삼






2. 사고를 깊고 풍부하게 하라




"사고"는 창작의 바탕이며 밑천이다.
텅 비어 있는 돼지 저금통에서 돈을 꺼낼 쓸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이 들어있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가 없다.
시 창작은 어떠한 것보다도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며,
개성과 독창성을 발휘하는 창조적인 예술이다.
그런데 이 창조성과 개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고"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똑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각자가 보는 것이 틀리며,
느끼는 것이 다른 까닭은 품고 있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이 한 인간의 개성을 만들어 내고 창조적인
글쓰기의 핵심을 형성해 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글은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다"라든지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을 주위에서 듣곤 한다. 이 말은 글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글쓴이의 "사고"가
그 사람의 정신과 인격 등의 총체적인 모습을 드러나게 해준다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 창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의 차이는 "사고"의 차이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통찰이 달라지고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산은 산천을 돈다
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全文


어떠한 만남이든지 그 만남은 이별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친구간의 만남이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이든, 혹은 부모 자식간의 인연이든
영원한 만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별의 운명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영원히 함께 있기를 맹세하고
갈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안타까운 소망에도 불고하고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인 것처럼 이별 역시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더구나 무수한 만남들로 얽힌 인간들의 관계는 제아무리 절친하고 가까운 관계에
놓일지라도 인간은 하나의 개체일 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는 단독자이다.
그것은 마치 서로 알아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에 각기 떨어져 있는 사물과도 같아서
자신의 외로움을 혼자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위에서 인용한 시는 이러한 우리들의 운명과 고독을 담담하고도 편안하게 노래하고 있다.
안개와 서로 교차되는 오산 인터체인지라는 일상의 사물을 여유롭게 응시하며
시인은 그 사물들을 통해서 인간이 지닌 고독함을 짚어 보고 그것을 넉넉히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깊이는 시인의 이러한 통찰, 즉 "사고"의 깊이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시 창작에서 사고란 어떤 심오하고 거창한 사상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위에서 인용한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 삶과 주변의 사물들을 함부로 보아 넘기지 않고 거기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진실을 발견하도록 하는 생각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난 여름 내
땡볕 불볕 놀아 밤에는 어둠 놀아
여기 새빨간 찔레 열매 몇 개 이룩함이여.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여물었나니.

-고은, <열매 몇 개> 전문



위의 시 역시 하나의 사물에 다다른 사고의 깊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찔레 열매지만 한 생명체가 탄생되고
성숙되기까지는 숱한 고난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은 작은 열매 몇 개를 통해
새삼 발견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그 열매가 환기하는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 경이로움과
소중함을 느끼고 우리들의 삶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다는 자연의 섭리마저 깨닫도록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더라도 시 창작에서 요구하는 "사고"는 한 사물의 개념을 파악하는
수박 겉핥기식의 사고가 아니란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그것은 사물마다 지닌 진실과 그 속에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찾아내어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충격과 깨달음을 주도록 하는 "사고"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틀에 박힌 생각, 사물의 거죽만을 보는 피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사물을 넓고 깊게 보는 것이 시 창작에서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