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과 산문시의 차이는 무엇인가 / 임보
로메다 님,
질문하신 대로 최근에 발표된 어떤 산문시들을 보면 산문과의 한계가 모호한 것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길이만 일반 산문에 비해 짧을 뿐이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산문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산문시도 시로 불리려면 분명 일반 산문과는 다른 변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겠지요.
다음의 글이 산문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산문시(散文詩)
현대시를 외형률의 유무와 행의 표기 형태를 기준으로 따져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가) 운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있는 시
나) 산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있는 시
다) 운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없는 시
라) 산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없는 시
가)와 다)는 운율적인 요소 곧 율격이나 압운 같은 외형률을 지닌 시이고
나)와 라)는 그런 외형률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가)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일반적인 자유시다.
나)는 문체로 볼 때 산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행 구분이 되어 있다.
김수영(金洙暎)의 「만용에게」라든지 서정주(徐廷柱)의 후기 기행시 같은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다)는 운율을 지닌 작품이지만 산문처럼 행 구분이 되어 있지 않는 경우다.
「장미·4」등 박두진(朴斗鎭)의 초기 작품들에서 쉽게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라)는 운율도 없으면서 행 구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이상(李箱)의 「지비(紙碑)」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가)와 나)를 분행자유시(分行自由詩), 다)와 라)를 비분행자유시(非分行自由詩)라고 구분해 명명키로 한다.
산문시는 바로 이 비분행자유시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산문시는 자유시의 하위 개념이다.
운율의 유무 등 그 내적 구조로 따져 본다면
나)가 다)보다 더 산문성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산문시를 분별하는 기준을 내적 특성으로 잡는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산문성과 비산문성의 한계를 따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문시는 그 외형적인 형태를 기준으로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산문시는 분행 의식이 없이 산문처럼 잇대어 쓴 자유시'라고 정의한다.
한용운(韓龍雲)의 자유시들은 행이 산문처럼 길지만 산문시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한용운의 시는 분행 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용운의 시처럼 그렇게 행이 긴 시들을 장행시(長行詩)라고 달리 부르고자 한다.
그런데 분행 의식을 기준으로 산문시를 규정해 놓고 보아도 역시 문제는 없지 않다.
라)의 산문시와 산문(짧은 길이의)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즉 산문시와 산문의 한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것이 산문이 아닌 시로 불릴 수 있는 변별성은 무엇인가.
산문시와 산문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결국 시(詩)와 비시(非詩)를 따지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나는 바람직한 시란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면 시정신이란 무엇이며 시적 장치는 어떤 것인가가 또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모든 글은 작자의 소망한 바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시 속에 담긴 시인의 소망은 보통인의 일상적인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훌륭한 시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소망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격이 높은 것이다.
말하자면 승화된 소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를 시정신이라고 부른다.
시정신은 진(眞), 선(善), 미(美), 염결(廉潔), 지조(志操)를 소중히 생각하는 초연한 선비정신과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가 되도록 표현하는 기법 곧 시적 장치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이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제시하기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지적을 해 보자면, 감춤[상징(象徵), 우의(寓意), 전이(轉移), persona(가화자)], 불림[과장(誇張), 역설(逆說), 비유(比喩)] 그리고 꾸밈[(운율(韻律), 대우(對偶), 아어(雅語)] 등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들을 한마디로 '엄살'이라는 말로 집약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는 시인의 승화된 소망(시정신)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산문시도 그것이 바람직한 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이어야만 한다.
伐木丁丁(벌목정정)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허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맹아리 소리 찌르릉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兀然(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ㅡ ―정지용(鄭芝溶) 「장수산(長壽山)·1」전문
「장수산·1」에 담긴 정지용의 소망은 무엇인가.
무구적요(無垢寂寥)한 자연 속에 들어 세속적인 시름을 씻어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 작품에 담긴 시정신은 '친자연(親自然) 구평정(求平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욕망을 넘어선 승화된 정신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이 작품에서의 주된 시적 장치는 대구의 조화로운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맨 앞의 '∼하이'로 종결되는 두 문장이 대우의 관계에 있고,
짐승인 '다람쥐'와 새인 '묏새'의 관계가 또한 그러하며,
'달'과 '중'을 서술하는 두 문장 역시 그러하다.
또한 의도적인 의고체(擬古體)의 구사로 우아하고 장중한 맛을 살리고 있다.
「장수산·1」은 일반적인 산문과는 달리 시정신과 그런 대로 시적 장치를 지닌,
시의 자격을 갖춘 글이라고 할 만하다.
산문시는 운율을 거부한 시로 잘못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산문시도 율격이나 압운 등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고,
그런 외형률이 아니더라도 내재율에 실려 표현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여타의 시적 장치들 역시 산문시 속에 어떻게 적절히 구사되느냐에 따라
그 글을 시의 반열에 올려놓기고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산문시는 외형상 산문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이지 결코 시에 미달한 글이어서는 곤란하다.―『엄살의 시학』(태학사)pp.85-88
로메다 님,
서구에서의 산문시는 정형시에 대한 반발로 19c 중엽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니 분행 자유시보다 먼저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현대시에 있어서도 1910년대 분행 자유시와 거의 동시에 산문시가 출현합니다.
김억, 주요한에 이어 정지용, 백석, 서정주 등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어떤 산문시는 시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중요한 원인은
첫째,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물려는 해체시의 의도적인 경향과
둘째, 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시인의 나태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의 경우는 의도적인 시도니까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둘째의 경우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산문시도 시로 불리기 원한다면 보통의 자유시와 마찬가지로 시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원초적인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메다 님,
어떤 이는 형태만 보고 분행 자유시보다 산문시 쓰기가 더 쉬울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산문시를 쓰는 것이 더 까다롭습니다.
왜냐하면 분행하지 않고 산문 형태 속에 시적 요소들을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건필을 빕니다.
'정보 창고 > 창작 도우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시 창작의 비법은 없다 - 사고를 깊고 풍부하게 하라 /박재삼 (0) | 2012.10.02 |
---|---|
(1) 시 창작의 비법은 없다 - 문학체험을 많이 해라/박재삼 (0) | 2012.10.01 |
[스크랩] `저녁`과 관련된 어휘 사전 (0) | 2012.05.26 |
우리 말의 어원/최재효 (0) | 2012.05.26 |
시는 표현이지 설명이 아니다-최영철 (0) | 2012.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