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원재훈
한때 나는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았다.
새가 날개를 가지듯
꽃이 향기를 품고 살아가듯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별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생의 비밀을 적었다.
아이의 미소를, 여인의 체취를, 여행에 깨우침을,
우체통은 간이역이었다.
삶의 열차가 열정으로 출발한다.
나의 편지를 싣고 가는 작은 역이었다.
그래 그런 날들이 분명 있었다.
낙엽에 놀라 하늘을 본 어느 날이었다.
찬바람 몰려왔다 갑자기 거친 바람에
창문이 열리듯, 낙엽은 하늘을 듬성듬성 비어 놓았다.
그것은 상처였다.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종착역이 되었다.
모두들 바삐 서둘러 떠나고 있다.
나의 우체통에는 낙엽만 쌓여 가고
하늘은 상처투성이의 어둠이었다.
밤엔 별들이 애써 하늘의 아픔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나의 텅 빈 주머니에는
그대에게 보낼 편지가 없다.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가고 있는데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주소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마음을 볼 수가 없다.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 시집『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하네』(하늘연못,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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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황동규 시인의 유명한「조그만 사랑노래」의 첫 소절이다. 1972년 선포된 긴급 조치로 말미암아 나라의 민주주의는 뒷걸음질 쳤고, 국민은 분노와 허탈감에 젖어 있었던 시기에 현실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노래한 시이지만 연애편지의 형식에 그 마음을 실었다. 실제로 당시엔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열어 보이며 주고받았던 편지 인심이 후했던 시절이었다.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아' '별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횡횡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내 생의 비밀을 적어'넣었고 밀실을 상대에게 드러내 보였다.' 나의 편지를 싣고 가는 작은 역이' 있었으며, '그래 그런 날들이' 내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종착역이 되었'으며, 그 사정은 너도 마찬가지다. 나의 텅 빈 주머니에는 그대에게 보낼 편지가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주소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마음을 볼 수가’ 없었다.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어지면서 우체통도 사라졌다. 우체통이 사라지자 고전적 연애도 폐기되었다. 편지를 입에 문 제비가 간간이 날아드는 곳은 담벼락이 높은 교도소와 병영뿐이었다. 편지를 쓰고 받는 자체가 통신 약자임을 자임하는 꼴이 되었다. 손가락만 곰지락거리면 실시간으로 대화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궁색 맞게 편지를 쓰는 수고를 왜 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편지는 사라져도 좋을 고루한 통신수단에 불과할까. 사실 사람들은 편지 한 통에 첨단통신시대의 문명이기들이 대신해 주지 못하는 사람의 훈기와 인정이 담겨있음을 잘 안다. 그 편지 한 장이 막힌 인정을 터주는 물꼬가 될 수 있음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쁘다는 이유 말고도 본의 아닌 조심성으로 편지 쓰기를 주저한다. 그런 편지를 써 보냈다가 무슨 저의가 있는 양 공연히 오해를 사는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감상적인 사람이나 알랑거리는 사람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두렵다. 사람의 진정을 의심하고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팍팍한 세상 풍토 탓이겠다. 그 고약한 현상은 실리만을 앞세운 과도한 경쟁심이 불러온 불신 때문은 아닐까. 마음에 혼란이 행동의 불안을 잉태하여 그 결과로 믿음이 고갈되고 대화가 부족하고 인정이 메마른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그 건조함이 인간경시 풍조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적이 염려되는 것이다. ‘모두들 바삐 서둘러 떠나고 있다.’ 이래저래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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