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영혼의 비타민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라포엠(bluenamok) 2013. 8. 4. 14:08

.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여행...박경리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 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 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 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큰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히말야야의 짐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적인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우주 만상 속의 당신/박 경리

 

내 영혼이

의지할 곳 없어 항간을 떠돌고 있을 때

당신께서

산간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

당신께서는

산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생사를 넘나드는 미친 바람 속을

질주하며 울부짖었을 때

당신께서는 여전히

풀숲 들꽃 옆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진작에 내가 갔어야 했습니다

당신 곁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찔레덩쿨을 헤치고

피 흐르는 맨발로라도

 

백발이 되어

이제 겨우 겨우 당도하니

당신은 아니 먼 곳에 계십니다

절절히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아직

한 발은 사파에 묻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히말라야의 노새/박 경리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司馬遷사마천/ 박경리

그대는 사랑의 記憶(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時間(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天刑(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肉體(육체)를 去勢(거세)당하고 人生(인생)을 去勢(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眞實(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박경리의 유고 시집

<버리고 갈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 박경리

 

 

13.8.3story by jace

 

                                                                                                                                                               

 

 

 

                                                                   

 

.

            ;                          

 

 

 

 

 


'시인의 향기 > 영혼의 비타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동네 집들/박형권  (0) 2013.08.19
바다로 달려가는 바람처럼/이해인   (0) 2013.08.05
친구/홍수희  (0) 2013.06.01
사랑하는 일이란/ 전숙  (0) 2013.05.29
나의 하늘은 /이해인  (0) 2013.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