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몸-문정희
불 속에서 짐승의 눈알을 보고
돌 속에서 숨 쉬는 사내를 꺼낸 적도 있지만
정작 내 몸은 내가 몰라
오늘은 나약하고 가련한 원숭이가 된다
내 몸을 읽어 달라! 종합병원 기계 앞에 나를 벗는다
밟을수록 깊게 파이는 시간이라는 늪지에 사는
나는 절지동물
절뚝이며 절뚝이며
신에게 보여 드리듯 몸을 열어 보인다
오늘은 기계가 나의 신이다
정밀하게 숫자로 드러나는 죄의 지문들
살덩이의 세밀화
사랑의 불이 켜 있는 동안
신도 이물질 따위를 잠복시키지 못하리라 믿어 보지만
그것을 보장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
오직 육체 가진자의 치명적인 슬픔으로
기계 앞에 숨김없이 나를 벗는다
암술 수술 씨방과 꽃잎을
한 잎 한 잎 낱낱이 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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