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나목의 글밭/혼잣말·그리운 날에게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

라포엠(bluenamok) 2012. 11. 30. 04:59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

                           안개비 임현숙

 

 

 

 

 이름 석 자 앞에 시인이라는 호칭이 무색한 날들이다.

한 줄의 시구도 떠오르지 않아 백지에 낙서만 하고 있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사춘기 시절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여학생이 그러하듯 내 플라토닉한 첫사랑은 선생님이었다.

남학생들과는 달리 여학생의 사고는 순수한 편이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마음 설레던 시절에 수업 시간에도 나는 꿈을 그렸다.

짝꿍과 글을 서로 교환해 보기도 하며 잡기장에 소설을 쓰기도 했다.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때는 여고 시절이었던 것 같다.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춘원 이광수...등 책을 읽으며

맘에 와 닿는 구절을 깨알처럼 적어놓았고

졸업반이었던 해  그 노트를 마음에 담고 있던 남자 친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다.

입시라는 장벽이 그 애와 나 사이에 놓여 서로의 마음만 확인하고 입시 후를 약속했지만

그 애와의 인연은 싱거운 추억이 되었다.

사춘기가 지나며 이따금 필요로 생활 글을 쓰기도 했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의지도 없었는데 

반백을 살아온 후에야 다시금 백지에 마음을 쏟으며 詩를 만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밴쿠버에 살기 시작해서 몇 년간은 풍요 속에서 생활도 마음도 여유로웠다.

그러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한순간에 모든 걸 잃게 되었고

절망 속에서 울고 있다가 블로그에 삶의 애환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늘을 향한 애원의 간구문이었다.

다시 일어서게 해달라고 떼를 쓰며 쏟아내고 나면 마음이 후련하고 스스로 위안이 되었다.

블로그를 통해 글 벗이 생기고 사이버 세상으로 나오게 되자

시상에 날개가 돋아 마음껏 하늘을 누비며 날았다.

글 속에 그리움과 외로움을 토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어

글 쓰는 시간이 내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시련의 터널을 지나오며 하나님이 희망이었다면 글은 내게 무한한 위로요 힘이었다.

시는 분신이었고 삶이었다. 매일 일을 하면서도 글을 썼다.

시간은 내가 쪼개 쓰기에 달린 것인 걸 그 때 알았다.

하루 일과로 몸이 늘어져도 시상이 떠오르면 잠을 덜 자고 글을 내렸고

운영하던 사이버 카페도(그 당시 모 문학카페와 음악카페 운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전력했다.

어쩌면 힘든 일상의 암울함을 잊으려 더 매달렸는지도 모르지만

돌아보니 그 시간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도록 내게 시련을 주신 것 같아 감사한다.

 

 이제는 시련의 터널 출구에서 햇살이 빛나는 밖으로 마악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이다.

그래서 일까?  단 한줄의 글도 쓸 수가 없는 날들이  슬프게 한다.

생활도 마음도 비어있을 때 시심은 높이 용솟음 치나 보다. 

그러나 이제는 글을 떠난 삶은 날개 잃은 새와 같을 것이기에

일상의 가장 행복한 시간 속에 나를 앉히고 시상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

초심을 더듬으며 마음의 샘물을 퍼 올려야 한다.

언제나 마르지않는 샘물이 되기를 바라며...

 

 

 

2012.11.29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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