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임현숙
저 위에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실 때
그분만이 아는 예치금이 담긴 통장을
목숨에 붙여 주셨어요
찾기 싫어도 날마다 줄어드는데
건강이라는 이자가 붙어 조금 불어나긴 해요
건강하게 살려면 이렇게 하라 이걸 먹어라
눈으로 귀로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도
맘 내키는 대로 살아왔지요
나무 한 그루도 잘 돌보지 않으면
푸른 이파리 벌레 먹고 갈변하듯이
먹물 같던 머리 하얀 서리꽃 밭인 지금
제멋대로 살아온 대가를 치르는 중이에요
소화제 한 번 안 드시던 시어머니
팔십 오수를 누리다 하늘로 가셨는데
내 통장 잔고는 얼마나 될까요
여름을 지나며 옷 서랍을 정리하는데
입지 않고 그냥 낡고 있는 옷들 위로
올해 산 옷들이 거드름 피우고 있어요
섬광처럼 꾸짖는 소리 들려요
'살아온 세월보다 남은 시간이 더 짧단다.'
그래요
허리 꺾인 세월을 미끄러지며
욕심을 내려놓아야겠어요
느닷없이
잔고가 영이 된다고 해도
가뿐히 날아갈 수 있게요
그런데요
잔액을 알면 더 열심히 살지 않을까요
하나님
아주 잠깐만 통장 잔액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림(202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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