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문정희 시인의 창작 세계와 작품 모음

라포엠(bluenamok) 2023. 11. 2. 03:52

 

 

 

문정희 시인 약력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 했다

1969년 『월간문학』신인상으로 등단 했으며, 시집

『문정희 시집』,『새떼』,『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하늘보다 먼곳에 매인 그네』,『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남자를 위하여』,『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등이 있다. 미국 뉴욕에서 영역 시집『Wind flower』,

『Woman on the terrace』가 출판되었고 그 외에도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알바니아어 등으로 번역 소개 되었다.

현대문학상, 소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문창과 교수를 역임했다.

 

 

출생국적직업학력경력활동기간장르수상

1947년 5월 25일(76세)
대한민국 전라남도 보성군
대한민국
시인
대학 교수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현대문학 박사 (졸업)
2022.10~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부 석좌교수
2014.9 제40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2007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5.3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석좌교수
1997.11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겸임교수
1994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
1969 ~
시문학
2015 제8회 목월문학상
2015 제47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학부문
2013 제10회 육사시문학상
2010 제7회 시카다상
2008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 문학부문상
2004 제16회 정지용문학상
2000 제14회 동국문학상
1996 제11회 문학사상사 소월시문학상
1975 제21회 현대문학상
1969 월간문학 신인상

 

 

 

 

시 속에서 자유롭고 용감하고 아름다운 그녀/문정희

 

책을 가까이 하고 싶은 계절이다. 서점에 깔린 수많은 책 가운데 한 권의 시집을 집었다.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 세상을 향해 늘 당당하고 우렁찬 목소리를 낸 문정희 시인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어떤 남다른 메시지를 담았을까? 시인의 새로운 육성이 궁금했다.

 

달콤한 가을 햇살이 비치는 서울 강남의 한 까페에서 그를 만났다. 시집과 더불어 산문집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다산책방)도 14년만에 출간했다. 지난 2011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카 포스카리 대학이 주관하는 예술가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3개월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머물며 <카르마의 바다>를 썼다. 카르마(carma)란 불교용어로 업보(業)를 뜻한다. 카르마와 바다는 어떤 관계일까.

 

 

“물”

 

“사람이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 속에는 많은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물을 마시고 그것이 내 몸속에 들어가 나의 슬픔과, 감동과, 사랑과 융화되면서 눈물로 나오기까지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한편으론 수세기가 담겨있다고 할 수도 있죠. 물이 몸에 들어가고 또 나오고 그것이 강으로 흘러가 바다가 되고 또 생명수가 되었다가 다시 눈물이 된다는 점에서 물의 카르마는 대단해요.”

 

43년간 시를 써온 그에게 물은 익숙한 소재였다. 스승 미당 서정주의 시를 물의 이미지로 해석해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물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해왔고 오랜 기간 내공을 쌓아온 저력이 물과 언어의 만남을 빚어냈다. “물은 우리 몸의 70%를 이루고 있고, 지구 역시 물로 뒤덮여 있지요. 그리고 물은 곧 생명이에요. 화성에도 물이 있느니 없느니 궁금해 하는 것도 생명과 연관되기 때문이에요.”

 

 

<작품 모음>

 

 

화장化粧을 하며



입술을 자주색으로 칠하고 나니
거울 속에 속국의 공주가 남아 있다
내 작은 얼굴은 국제 자본의 각축장
거상들이 만든 허구의 드라마가
명실공히 그 절정을 이룬다
좁은 영토에 만국기가 펄럭인다

금년 가을 유행 색은 섹시 브라운
샤넬이 지시하는 대로 볼연지를 칠하고
예쁜 여자의 신화 속에
스스로를 가두니
이만하면 음모는 제법 완성된 셈
가끔 소스라치며
자신 속의 노예를 깨우치지만
매혹의 인공 향과 부드러운 색조가 만든
착시는 이미 저항을 잃은 지 오래이다

시간을 손으로 막기 위해 육체란
이렇듯 슬픈 향을 찍어 발아야 하는 것일까
안간힘처럼 에스테로더의 아이 라인으로
검은 철책을 두르고
디올 한 방울을 귀밑에 살짝 뿌려 마무리한 후
드디어 외출 준비를 마친 속국의 여자는
비극배우처럼 몸을 일으킨다  

 

 

 

즐거운 밀림의 노래

 


백화점마다 모피 세일을 한 후
거리에는 때아닌 짐승들이 밀려나와
소란을 떨었다.

빌딩 사이로 밍크가 재빨리 사라지는가 하면
지하실에는 양 한 마리가 석간신문을 사고 있었다.
오리들은 남의 이불 속까지 숨어들었다지.
아이구 재미있어라, 심지어 악어들조차
젊은 계집애의 겨드랑이에 끼어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뱀들은 요즘엔 주로 살찐 사내들의 허리를 노린다는군.

비야 오지 마라.
이 도시가 무서운 밀림이 되고 말리라.
나이 어린 여우 두 마리가 열렬히 교미를 하며
호텔문을 나서는 것을 보아라.
네거리에 멈춰선 자동차 안에도
신호등을 노려보는 낙타의 검은 눈이 있다.
주름살 수술을 하고 돌아가는 중년여자의
목을 애무하는 살쾡이들.
쥐나 토끼들도 털을 세운 채
택시를 기다리는 청년의 호주머니를
슬슬 덮치고 있다.
그렇잖아도 짐승이 많아 늘 체증이던
이 도시엔 백화점 세일 후 퍼져나온 짐승들로
더욱더 스산해지고 있다. 정글이 되어가고 있다. 

 

 

 

남자를 위하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마흔 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
아무 의도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
나의 운명과는 상관도 없지만
별!을 나는 좋아한다.

별이라고 말하며 흔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사물보다 말을 더 좋아하는가보다.
혼자 차를 마시면서도
차를 마시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싶고
여행보다
여행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정작 연애보다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어쩌면 별도 사막일지 몰라
결국 지상에는 없는 불타는 지점
하지만 나는 별을 좋아한다.
나의 조국은 별같은 말들이 모여서 세운
시의 나라
나를 키운 고향은 책인지도 몰라   

 

 

 

남편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물 만드는 여자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려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몸이 큰 여자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엎어
해마다 튼튼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 같은 남자와 씨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 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 벌려 상추쌈을 먹는
야성의 핏줄 선명한
뱃가죽 속의 고향 노래를
젖가슴에 뽀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추의 무게를 달고
그리고 규격 줄자 앞에 한 줄로 줄을 서는
도시 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가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이 된 시대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채찍질하며
뜻없이 시들어가는 이 거리에
나는 한 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  

 

 

*미국의 심리분석학자 클라리사 P. 에스테스가 한 말.  

 

 

 

오빠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조등이 있는 풍경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탯줄

 

 

대학병원 분만실 의자는 Y자였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새끼 밴 짐승으로
두 다리 벌리고 하늘 향해 누웠다

 

성스러운 순간이라 말하지 말라
하늘이 뒤집히는
날카로운 공포
이빨 사이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인두로 생살 찢기웠다

 

드디어
내 속에서 내가 분리되었다
생명과 생명이 되었다

두 생명 사이에는
지상의 가위로는 자를 수 없는
긴 탯줄이 이어져 있었다

 

가장 처음이자
가장 오래인 땅 위의 끈
이보다 확실하고 질긴 이름을
사람의 일로는 더 만들지 못하리라

 

얼마 후
환속한 성자처럼
피 냄새 나는 분만실을
한 어미와 새끼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나의 아내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 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잔을 끓여다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미당의 시

**매릴린 옐름, <아내>  

 

 

 

손의 고백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시계와 시계 사이

 

 

이 아침 고장 난 시계 속에 눈을 뜬다
고장 난 시계가 이를 닦고
고장 난 시계가 밥을 먹고
고장 난 시계가 나이를 먹는다
그래도 어딘가 맞는 시계가 있으리라
나는 그런 시계를 하나 갖고 싶다
나는 CNN을 본다. CNN은 당황하여
고장 난 시계가 있는 곳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꼬리를 잘 흔들고 손을 싹싹 비비고 눈치를 살핀다
고장 난 시계에다 총구를 갖다 댄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러 다니는 사람들을
대화라든가 외교라는 말로 보도한다
결국 모두가 제 힘으로 살다 가는 것
세상의 모든 시계를 똑같게 고칠 수는 없나 보다
너와 나 사이에는 어차피 시차가 있다
고장 난 시계로 길을 걷다가
교차로에 서서 시계탑을 본다
나의 시계가 맞는지 교차로의 시계가 맞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시계는 나이가 없다
제각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  "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 응 "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네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 응 "  

 

 

 

파 뿌리

  

 

크고 뭉툭한 부엌칼로 파 뿌리를 잘라낸다
마지막까지 흙을 움켜쥐고 있는
파 뿌리를 잘라내며 속으로 소리지른다
 

결혼은 왜 시를 닮으면 안되는가
질기게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가
뿌리 없이 가볍게 날아다니는 깃털이란
그토록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것인가
언제나 정주(定住)만을 예찬해야 하는가
가축처럼 번식과 무리를 필요로 하고
영원히 동반이어야 하는가
검은 머리는 언제 파뿌리가 되는가
 

나 오늘 파 뿌리를 잘라낸다
부엌칼 중 제일 크고 뭉툭한 칼로
남은 파를 술술 썰어
펄펄 끓는 찌개에 쓸어 넣는다   

 

 

 

아침 이슬

  


지난밤 무슨 생각을 굴리고 굴려
아침 풀잎 위에
이렇듯 영롱한 한 방울의 은유로 태어났을까
고뇌였을까, 별빛 같은
슬픔의 살이며 뼈인 생명 한 알
누가 이리도 둥근 것을 낳았을까
고통은 원래 부드럽고 차가운 것은 아닐까
사랑은
짧은 절정, 숨소리 하나 스미지 못하는
순간의 보석
밤새 홀로 걸어와
무슨 말을 전하려고
아침 풀잎 위에
이렇듯 맑고 위태한 시간을 머금고 있는가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성공시대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제비를 기다리며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집 가풍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씨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에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다리를 구워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러브호텔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 이야기

  


내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먼 분이셨다
어릴 적 운동회 날, 실에 매단 밤 따먹기에 나가
알밤은 키 큰 아이들이 모두 따가고
쭉정이 밤 한 톨 겨우 주워온 나를
이것 봐라, 알밤 주워왔다! 고 외치던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깊숙이 먼 분이셨다
어머니의 노래는 그 이후에도
30년도 더 넘게 계속되었다
마지막 숨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쭉정이 밤 한 톨
남의 발밑에서 겨우 주워오는
내 손목 치켜세우며
이것 봐라, 내 새끼 알밤 주워왔다! 고
사방에 대고 자랑하셨다  

 

 

석남꽃

 

 

새벽 두 시인데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나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아요
저녁 때 사거리에서
청담사거리를 묻는 노인에게
그만 봉은사거리를 가리키고 말았어요
그 노인은 지금쯤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요

 

청담사거리를 찾다 지쳐
수천 마리 귀뚜라미들을 데리고 쓰러져 있을까요
외줄에서 떨어진 줄광대처럼
산발한 어둠 속에 떨고 있을까요
정육점의 불빛처럼 충혈된 밤
사방에서 컹컹 내지르는 짐승소리를 들으며
모래바람 날리는 자동차들 속에
털썩 무릎을 끓고 앉아
성직자처럼 기도를 올리고 있을까요

 

죽어서도 석남꽃 머리에 꽂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온 신라의 남자처럼
벌써 죽어 아름다운 관에 누워 있을까요

 

내 불면의 가지 끝에 검은 눈썹달이
갈매기처럼 끼룩거리고 있어요

 

세상에는 왜 이리 길을 묻는 사람이 많을까요
여보, 나침반과 지도는 모두 어디에 있지요 

 

 

 

 

가을 노트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초겨울 저녁

 

 

 

나는 이제 늙은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 버리고 정갈해진 노인같이

부드럽고 편안한 그늘을 드리우고 앉아

바람이 불어도

좀체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성한 꽃들과 이파리들에 휩쓸려 한 계절

온통 머리 풀고 울었던 옛날의 일들

까마득한 추억으로 나이테 속에 감추고

흰 눈이 내리거나

새가 앉거나 이제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저 대지의 노래를 조금씩

가지에다 휘감는

나는 이제 늙은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몇 굽이 암벽을 오르니 드디어 설원

나무 한 그루 온몸 비틀며

앙상한 생명을 증거하고 있다

하늘과 대결하고 있지만

입술로 사랑할 일도 많지 않으니

회오리도 햇살도 부드럽기만 하다

이제 나에게 나이란 없다

없기로 했다

오직 홀로의 등정이 있을 뿐

스승도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다

나이면 다이다

그 말고 누가 더 정확하게

이 아찔한 기상도와

주거부정 철새의 길을 일러줄 수 있단 말인가

찬바람 머리칼처럼 쓸어 넘기며

가만히 서 있어도 무너지는 폐허!

이윽고 여기가 정상이라는 것을

 

 

 

 

 

 

내 친구 연이는 꿈 많던 계집애

그녀는 시집갈 때 이불보따리 속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한 질 넣고 갔었다.

남편은 실업자 문학 청년

그래서 쌀독은 늘 허공으로 가득했다.

밤에만 나가는 재주 좋은 시동생이

가끔 쌀을 들고 와 먹고 지냈다.

연이는 밤마다

세계일주 떠났다.

아테네 항구에서 바다가제를 먹고

그 다음엔 로마의 카타꼼베로!

검은 신부가 흔드는

촛불을 따라 들어가서

천년 전에 묻힌 뼈를 보고

으스스 떨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또 떠나리.

아! 피사, 아시시, 니스, 깔레 ......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그녀는 혀가 꼬부라지고

발이 부르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만

뉴욕의 할렘 부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밤에만 눈을 뜨는

재주꾼 시동생이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몽땅 들고 나가

라면 한 상자와 바꿔온 날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울었다.

결혼반지를 팔던 날도 울지 않던

내 친구 연이는

그날 뉴욕의 할렘 부근에 쓰러져서 꺽꺽 울었다.

 

 

 

 

거위

 

 

나는 더이상 기대할 게 없는 배우인 것 같다

분장만 능하고 연기는 그대로인 채

수렁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오늘 텔레비전에 나온 나를 보고

왝 왝 거위처럼 울 뻔했다

내 몸 곳곳에 억압처럼 꿰맨 자국

뱀 같은 욕망과 흉터가

무의식의 주름 사이로

싸구려 화장품처럼 떠밀리고 있었다

구멍 난 신발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차갑고 더러운 물을 숨기며

시멘트 숲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다 들켜버렸다

빈틈과 굴절 사이

순간순간 태어나는 고요하고 돌연한 보석은

사라진 지 오래

기교만 무성한 깃털로

상처만 과장하고 있었다

오직 황금알을 낳기 위해

녹슨 철사처럼 가는 다리로 뒤뚱거리는

나는 과식한 거위였다

 

ㅡ《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먼길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신록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구나

솔개처럼 푸드득 날고만 싶은

눈부신 신록, 예기치 못한 이 모습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지난 겨울 깊이 박힌 얼음

위태로운 그리움의 싹이 돋아

울고만 싶던 봄날도 지나

살아 있는 목숨에

이렇듯 푸른 노래가 실릴 줄이야

좁은 어깨를 맞대고 선 간판들

수수께끼처럼 꿰어다니는

물고기 같은 차들도

따스한 피 돌아 눈물겨워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참고 기다린 것밖엔

나는 한 일이 없다

아니, 지난 가을 갈잎 되어

스스로 떠난 것밖엔 없다

떠나는 일 기다리는 일도

힘이 되는가

박하 향내 온통 풍기며

세상에 눈부신 신록이 왔다 

 

 

 

손의 고백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유리창을 닦으며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져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져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숲 속의 비망록

 

 

여름 숲 속 창작 교실에 갔다가

그만 폭우에 갇히고 말았다

외딴 흙 집 알전구에 매달려

박쥐와 함께 온 밤을 퍼덕이었다

충혈된 짐승털 냄새를 풍기며

폭우가 밤새 달려들었다

이윽고 안개가 베일을 벗자

어디서 걸어왔는지

희뿌연 아침이 이마를 드러냈다

풀들이 젖은 무릎으로

다시 떠오르는 해를 기적처럼 바라보았다

한 소년이 방문을 두드렸다

토란 잎 세숫대야에 맑은 물 채워들고

그 위에 은방울꽃 띄워놓고

어서 세수를 하라고 했다

풋풋한 시구가 첫사랑처럼 피어나는

여름 숲 속의 세숫대야 속으로

불현 듯 초록산 하나가 크게 팔을 벌리더니

숨막히게 나의 입술을 빼앗아버렸다

 

 

 

알몸의 시간

 

 

옷 한 벌 사려고 상가를 돌았다

내게 맞는 옷은 좀 체 없었다

조금 크거나 작거나 디자인이 맘에 안 들었다

세상의 옷들은 공주나 말라깽이

배우들을 위한 것뿐이었다

옷들은 대뜸 뚱뚱한 내 몸매부터 비웃었다

슬며시 부아가 나서

한 번 입어나 보려고 다리를 넣었다가

으드득! 소리를 내는 바람에

마치 성추행을 하려다 들킨 것처럼

얼른 밀쳐버렸다

 

상가를 빠져나오며

모처럼 하늘에 감사했다

군살은 완충 스펀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신의 배려

모든 옷이 몸에 맞는다면 그건 재앙이다

 

과일 가게에서 붉고 둥근 얼굴로 서성대다가

그만 야채로 분류된 토마토처럼

총총히 마굴 같은 상가를 무사히 벗어났다

 

생애에 한번쯤 꿈꾸는 사랑처럼

눈부신 옷을 꼭 한 벌쯤 입고 싶었지만

어쩌면 알몸의 시간이

먼저 올 것 같은 예감에

발걸음이 조금 떨렸다

 

 

 

달팽이

 

 

여름에도 얇은 살 얼음을 덮고 사는

속살이 부드러운 누이

미루나무 속잎 피는 강가

코흘리개 동생을 오글오글 등에 업고

진흙 같은 생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간다

 

사방에 벼랑은 이리도 많아

마치 출가승처럼 근신하다가

풀잎 끝에서도

곧잘 긴 귀를 뽑아

먼 곳을 바라보곤 한다

 

홀연 절벽에 이르러

누옥 한 채를 상징처럼 남겨두고

속살이 부드러운 누이

살얼음 녹듯이 가고 없다

 

 

 

유산 상속

 

 

비밀이지만 아버지가 남긴

폐허 수만 평

아직 잘 지키고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척박한 그 땅에

태풍 불고 토사가 생겨

때때로 남모르는 세금을 물었을 뿐

광기와 슬픔의 매장량은 여전히 풍부하다

열다섯 살의 입술로 마지막 불러본

아버지! 어느 토지 대장에도 번지가 없는

폐허 수만 평을 유산으로 남기고

빈 술병들 가득 야적해 두고

홀연 사라졌다

열대와 빙하가 교차하는 계절풍 속에

할 수 없이 시인이 된 딸이

평생을 쓰고도 남을

외로움과 슬픔의 양식

이렇듯 풍부하게 물려주고

그는 지금 어디에서

홀로 술잔을 들고 있을까

 

 

-시집 '나는 문이다'에서

 

 

 

찔레꽃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첼로처럼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매캐한 담배 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 싶다

기껏해야 줄 몇 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 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나도 면벽하고 싶다.
무언(無言), 두 글자로 가슴에 못을 치고
서늘한 눈빛으로
벽에다 구멍 하나 내고 싶다
그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싶다
 
그런데 나만이 아니었구나
세상에 저 많은 창들을 보아라
 
공룡처럼 치솟은 아파트에도
제멋대로 달리는 자동차에도
창은 많이도 달려 있구나
 
모두가 면벽하며 살았었구나
무언, 두 글자로 가슴에 못을 치고
서늘한 제 눈빛으로 벽을 뚫으며
하늘을 보려고 괴로워했었구나
창을 만들었구나

 

 

 

순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 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고독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 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숨죽여 홀로 운 것도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지막처럼 고백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두려워하며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뛰는 것을
당신께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한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미로

 

 

어떤 그리움이

이토록 작고 아름다운 미로를 만들었을까요

별 하나가 겨우 지나가도록

별 같은 눈빛 하나가 지나가도록

어떤 외로움이

강물과 강물 사이 꿈같은 다리를 얹어

발자국 구름처럼 흘러가도록

그 흔적 아무 데도 없이

맑은 별 유리처럼 스며들도록

가면 속 신비한 당신의 눈빛이

나만 살짝 찾을 수 있도록

어떤 사랑이

이토록 실핏줄처럼 살아 있는 골목을 만들었을까요

 

 

 

시이소오

 

 

어둠이 내려오는 빈 공원에서

혼자 시이소오를 탄다

한쪽에는 내가 앉고

건너편에는 초저녁 서늘한 어둠이 앉는다

 

슬프고 무거운 힘으로 지그시 내려앉았다가

나는 다시 허공으로 치솟는다

 

순간에 나는 맨땅으로 굴러 떨어진다

 

어둠은 한 마리 짐승 같다

푸른 피 흐르는 상처를 안고 뒹구는 나를

시이소오는 숨을 헐떡이며 곁에서 바라본다

 

나는 다시 시이소오를 탄다

 

추락은 예비되어 있고

불안한 훈장처럼 상처는 수없이 따라 왔지만

나는 혼자 시이소오를 탄다

 

어둠이 내려오는 빈 공원에서

슬프고 무거운 힘으로 지그시 내려앉았다가

다시 그 힘으로 허공으로 치솟는다

 

 

-『현대시학』(2012.1)

 

 

 

내가 화살이라면

 

 

내가 화살이라면

오직 과녁을 향해

허공을 날고 있는 화살이기를

 

일찍이 시위를 떠났지만

전율의 순간이 오기 직전

과녁의 키는 더 높이 자라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팽팽한 허공 한가운데를

눈부시게 날고 있음이 전부이기를

 

금빛 별을 품은 화살촉을 달고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고독의 혈관으로

불꽃을 뚫는 장미이기를

숨 쉬는 한 떨기 육신이기를

 

길을 알고 가는 이 아무도 없는 길

길을 잃은 자만이 찾을 수 있는

그 길을 지금 날고 있기를

 

 

 

너 처음 만났을 때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들 바를 모르리.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
아무 의도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
나의 운명과는 상관도 없지만
별!을 나는 좋아한다.

별이라고 말하며 흔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사물보다 말을 더 좋아하는가보다.
혼자 차를 마시면서도
차를 마시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싶고
여행보다
여행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정작 연애보다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어쩌면 별도 사막일지 몰라
결국 지상에는 없는 불타는 지점
하지만 나는 별을 좋아한다.
나의 조국은 별같은 말들이 모여서 세운
시의 나라
나를 키운 고향은 책인지도 몰라 

 

 

슬픈 몸

 

 

불 속에서 짐승의 눈알을 보고

돌 속에서 숨 쉬는 사내를 꺼낸 적도 있지만

정작 내 몸은 내가 몰라

오늘은 나약하고 가련한 원숭이가 된다

내 몸을 읽어 달라! 종합병원 기계 앞에 나를 벗는다

밟을수록 깊게 파이는 시간이라는 늪지에 사는

나는 절지동물

절뚝이며 절뚝이며

신에게 보여 드리듯 몸을 열어 보인다

오늘은 기계가 나의 신이다

정밀하게 숫자로 드러나는 죄의 지문들

살덩이의 세밀화

사랑의 불이 켜 있는 동안

신도 이물질 따위를 잠복시키지 못하리라 믿어 보지만

그것을 보장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

오직 육체 가진자의 치명적인 슬픔으로

기계 앞에 숨김없이 나를 벗는다

암술 수술 씨방과 꽃잎을

한 잎 한 잎  낱낱이 젖힌다

 

 

戀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대 영혼을 만지지 못하고
어찌 나의 영혼을 간직할 수 있나요?
어떻게 그것을 넘어 다른 것으로
높일 수 있을까요?
오! 칠흑 같은 어둠
그 어느 상실한 것의 옆에
깊은 당신의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낯설고 아득한 그곳에
나의 영혼을 머물게 하고 싶어라.
그러나 당신과 나를 스쳐가는
모든 것들은
두 줄의 현에서 하나의 음을 켜는
바이올린의 활처럼 우리를 함께 사로잡는구나.
우리를 손에 쥐고 있는 연주자는 누구일까?
과연 우리는 어느 악기에 매어 있는 것일까?
오! 감미로운 선율이여.

 

 

내가 화살이라면

 

 

내가 화살이라면

오직 과녁을 향해

허공을 날고 있는 화살이기를

 

일찍이 시위를 떠났지만

전율의 순간이 오기 직전

과녁의 키는 더 높이 자라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팽팽한 허공 한가운데를

눈부시게 날고 있음이 전부이기를

 

금빛 별을 품은 화살촉을 달고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고독의 혈관으로

불꽃을 뚫는 장미이기를

숨 쉬는 한 떨기 육신이기를

 

길을 알고 가는 이 아무도 없는 길

길을 잃은 자만이 찾을 수 있는

그 길을 지금 날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