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사는 여자
추억이 저무는 창가에서

시인의 향기/바다 한 접시(여)

문숙의 시모음

라포엠(bluenamok) 2023. 9. 22. 19:23

문 숙

- 1961년 경상남도 하동 출생.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 2000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 시집으로 『단추』(2006), 『기울어짐에 대하여』(2012), 『불이론』(2021) 등이 있음.

- 현대불교문학상(2022) 수상.

 

 

항아리

 

 

 

된장을 담아두던 항아리에

모래를 깔고 물을 부어 스킨딥시스를 심었다

제 몸에 꽃을 담고도

여전히 된장 냄새를 피운다

자주 물을 갈아도

노랗게 꽃잎이 타들어간다

단지를 들어내자

항아리 밑이 된장물로 흥건하다

짜디짠 눈물이 고였다.

숨구멍으로

제 몸에 담았던 한 흔적을

조금씩 몸 밖으로 버리고 있었던 항아리

한 사람의 기억을 버리려

숨 죽여 울던 저 여자

 

 

어머니

 

 

부엌 천정에 매달린 형광등

스위치를 당겨도 쉽게 스파크가 일지 않는다

빛이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아 깜박거린다

하얗던 몸속으로 검은 시간이 스민다

 

양 모서리가 캄캄해져 온다

긴 시간 나를 굽어보며

내 모퉁이를 환하게 비추던 한 생애가

속절없이 저물고 있다

 

 

금간 화분

 

 

종일 어둠을 버티고 선 골목

지하방 창틀에 금 간 질화분 하나

속을 텅 비우고 겨울을 나고 있다

누군가를 담아 키운 듯

주위에는 마른 흙이 묻었다

온 몸을 가로지른 지렁이 같은 금

 

어두컴컴한 지하 셋방에 웅크린 여자

한때는 올망졸망 초롱꽃 같은 새끼를 품고

젖줄을 물리며

백열등이 환한 거실을 받치고 섰던 진호엄마

강 건너 오색 불빛에 이끌려

사이키 조명을 따라돌다

끝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여자

겨울바람에 시들고 있을 아이들을 떠 올리며

문풍지처럼 울고 있다

 

이젠 아무도 것도 담을 수 없게 된

저 금간 화분

텅 빈 몸속으로 진눈깨비만 내린다

 

 

 

용수 할매

 

 

리어카를 끌고 오는 용수 할매

가을비는 폐지를 적시며 내리고

길 앞으로 쏟아질 듯 뒤따르는 리어카가

야윈 걸음을 밀고 있다

 

일찍 자식 앞세우고

어린 손자랑 등 기대며 살던 할매

컴컴한 골목길

휘파람이 휙휙 날던 밤

손자마저 낙과처럼 떨구고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중심을 잃은 채

길처럼 매달렸던 하나님도 놓고

몇 달을 주검처럼 보냈단다

 

오늘은 저승이라도 끌고 오는지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가지 끝에 매달린 가랑잎처럼

리어카 손잡이 움켜잡고

흰 고무신에 담긴

마른 풀잎 같은 다리로

미끌미끌 버티며 오고 있다

 

 

 

단추

 

장롱 밑에 떨어진 단추

어둠에 갇혀

먼지더미에 푹 파묻혀 있다

어느 가슴팍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까

 

한 사람을 만나

뿌리 깊게 매달렸던 시절을 생각한다

따스하게 앞섶을 여며주며

반짝거리던 날들

 

춥고 긴 골목을 돌아나오며

한 사람의 생애가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채우다, 끝내

서로를 동여맨 실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단추

 

세상 밖으로 구르다

먼지를 무덤처럼 뒤집어쓴 채

잊혀진 그대

 

 

첫사랑

 

 

공사 중인 골목길

접근 금지 팻말이 놓여있다

시멘트 포장을 하고

빙 둘러 줄을 쳐놓았다

굳어지기 직전,

누군가 그 선을 넘어와

한 발을 찍고

지나갔다

 

너였다

 

 

 

나무를 심으며

 

 

사랑이란 파내는 일

나를 너만큼

 

그 자리에 너를

꾹 눌러 심는 일

 

 

부부

 

좌판 위에 고등어자반 한 손

제 속을 버리고 한 쌍이 되었다

 

한 마리가 가슴을 넓게 벌리고

또 한 마리는 뼈까지 드러내며

바다의 푸른 기억을

서로의 품으로 껴안는다

가슴을 갈라 등을 품는 아픔의 두께

 

잔물결이 사라진 시간

머리도 비우고 지느러미도 접은 채

서로에게 절여진 고등어 두 마리

그들의 접힌 상처 사이에

허옇게 말라붙은 바다가 보인다

 

 

껍질의 내력

 

 

내리막길을 내려오다 굳은살이 박였다

평지에서는 적당히 맞았던 신발이

내리막길에선 헐렁해졌다

기울어져 봐야 틈을 알 수 있다

 

중심을 잡으려다

쓸리고 쓸려 짓무르기를 반복했다

관계가 무너지는 시간이었다

굳은살의 시작은 상처다

여린 것들은 이렇게 껍질을 입는다

 

이젠 내 껍질에 내가 찔려 아프다

방패가 나를 향한 무기가 되고 있다

너를 신고 너무 오래 버틴 탓이다

부처의 맨발을 생각한다

 

 

 

수종사 부처

절 마당에 검은 바위처럼 엎드려 있다

한자리에서 오전과 오후를 뒤집으며 논다

단풍객들이 몸을 스쳐도 피할 생각을 않는다

가면 가는가 오면 오는가 흔들림이 없다

산 아랫것들처럼

자신을 봐 달라고 꼬리를 치거나

경계를 가르며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생각을 접은 눈동자는 해를 따라 돌며

동으로 향했다 서로 향했다 보는 곳 없이 보고 있다

까만 눈동자를 따라 한 계절이 기침도 없이 지나간다

산 아래 세상은 마음 밖에 있어

목줄이 없어도 절집을 벗어날 생각을 않는다

매이지 않아

지금 이곳이 극락인 줄을 안다

지대방을 청소하는 보살에게 개 이름을 물으니

무념이라고 한다

불이론

개와 강아지는

나쁜 놈과 착한 놈만큼의 거리다

낮과 밤만큼이나 멀고도 가까운 사이

욕과 칭찬만큼이나 적대적인 관계

개는 부정어의 접두사

강아지는 사랑의 대명사

천한 것은 개

자식이나 손주처럼 귀한 것은 강아지

세상의 모든 강아지는

개를 빌려 세상에 나왔고

세상의 모든 개들도

강아지를 거쳐서 왔다

밤이 낮을 품고 낮이 밤을 품듯

우리는 하나다

비틀비틀 취객 하나가 내 옆을 스치며

개새끼” 하고 지나간다

​​

제로섬 게임

 

혼자 김장을 하다가

오른손이 쥔 칼에 왼손 손가락이 깊게 베였다

혼자 아닌 혼자라는 생각에

마음 한끝이 흔들렸던 모양이다

왼손이 믿었던 오른손

둘이면서 하나라 믿었던 마음을 베였다

상처란 서로를 한 몸처럼 여길 때 생긴다

내 한 몸도 서로 어긋날 때가 있어

내가 나를 베고 또 봉합하며

둘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었다가 한다

오늘은 다친 왼손 때문에

부엌을 모르던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하숙생 같던 딸아이가 내 머리를 감겨주기도 한다

내가 나를 벤 값 이만하면 됐다

환하다는 것

 

중심이 없는 것들은 뱀처럼 구불구불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며 길을 간다

능소화가 가죽나무를 휘감고

여름 꼭대기에서 꽃을 피웠다

잘못된 것은 없다

시작은 사랑이었으리라

한 가슴에 들러붙어 화인을 새기며

끝까지 사랑이라 속삭였을 것이다

꽃 뒤에 감춰진 죄

모든 시선은 빛나는 것에 집중된다

환하다는 것은

누군가의 고통 위에서 꽃을 피웠다는 말

낮과 밤을 교차시키며

지구가 도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돌고 돌아 어느 전생에서

나도 네가 되어 본 적 있다고

이생에선 너를 움켜잡고

뜨겁게 살았을 뿐이라고

한 죽음을 딛고 선

능소화의 진술이 화려하다

 

겨우살이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 집에 입양되어 왔다

낯선 품에 깃드느라

먹이를 토하고 집 안에 오물을 묻히며 병든 날을 살고 있다

나도 아픈 강아지를 품느라 함께 몸살을 앓는다

먼 길을 돌아서 내게로 온 인연​

병이 깊어 숨을 할딱이는 강아지를 안고

부처님 하느님을 분별없이 찾는다

거친 시간을 지나

강아지가 조금씩 죽음을 밀어내며 꼬리를 흔든다

시든 풀잎 같은 한 생명이 품속을 파고들며

내 숨소리에 기대어 잠이 는다

생명 하나가 겨울을 뚫고 내 영혼 깊숙이 발을 내렸다

허공 같은 내 가슴팍에도 새 둥지만 한 봄이 파랗게 얹혔다

종이 다른 것끼리 서로 가슴팍을 붙이고

지구 종말 같은 겨울을 팔딱팔딱 살아 내는 중이다

내가 시를 안 쓸 수 없는 이유

지나간 인연이 그리워서 안 쓸 수 없고

첫사랑이 잘 산다는 말에 배가 아파서 안 쓸 수 없고

주말농장에서 오이를 도둑맞아 안 쓸 수 없고

머리 커진 자식한테 상처받아 안 쓸 수 없고

이런 내가 밴댕이 소갈딱지 같아서 안 쓸 수 없다

지하 바닥에서 잠드는 영혼을 보며 안 쓸 수 없고

자식에게 버려진 노인을 보며 안 쓸 수 없고

공원 녹지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안 쓸 수 없고

밧줄에 묶인 개를 보며 안 쓸 수 없고

이런 내가 그들의 울음밖에 될 수 없어 안 쓸 수 없다

돌 틈 사이로 새싹을 밀어 올리는 민들레를 보며 안 쓸 수 없고

새끼에게 제 살점을 내어주는 가시 물고기를 보며 안 쓸 수 없고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새둥지를 보며 안 쓸 수 없고

갓길에서 환하게 핀 들국화를 보며 안 쓸 수 없고

이런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눈길밖에 될 수 없어 안 쓸 수 없다

부엌에서 남의 살점을 요리하며 안 쓸 수 없고

내 돈지갑이 다른 생명의 피울음임을 알고 안 쓸 수 없고

내 손길에서 죽어나간 병아리를 보며 안 쓸 수 없고

안 쓸 수 없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안 쓸 수 없고

내 삶이 다 죄라서 안 쓸 수 없다

억울해서 쓰고 비참해서 쓰고

가슴 아파서 쓰고 미안해서 쓰고

팔자 같고 운명 같아서 안 쓸 수 없다

나한테 시는 고작 그런 것이라서 쓰고

그래서 큰 시인이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에서 또 쓴다

중앙난방용 굴뚝

 

80년대의 저녁 하늘에 길을 내던 긴 문장

아파트 노인정 뒤뜰에 우뚝하다

등대 같은 몸 주위로 옹기종기

길 잃은 새들이 모여 지친 날개를 쉬고 있다

개별난방에 밀려 지하 보일러가 멎고

십수 년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매운 언어를 부리던 시절은 가고

깊게 말문을 닫은 채 사랑이 떠난 몸처럼 식었다

캄캄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온 뜨거운 수사

낡은 이데올로기를 걸친 노인처럼

세상으로부터 잊힌 채 쓸쓸하다

 

어머니가 병원에 가던 날

 

 

파랗던 관음죽 이파리가 누렇게 변했다

관음보살의 이름을 지니고

베란다 구석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화분이다

긴 세월 한자리에서 꼿꼿했다

물기가 말라도 축 처진 모습을 한 적이 없어

식구들은 물 주는 일을 자꾸 까먹었다

사철 푸르기만 해서

보아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눈과 가슴에서 멀어지는 일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몇 번이나

희고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는 사실도 우린 기억하지 않았다

관음죽은 집 안에서 그렇게 서서히 버려져 갔다

오늘에서야 누렇게 병든 얼굴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 온 것이다

, 지금 많이 아프다고.

싱크홀

 

 

한 사람이 떠난 자리가 움푹 파였다

이승과 저승의 구분은 아픈 위로였다

떠난 사람이 남기고 간

꼬불꼬불한 머리카락 한 올

모든 존재는 떠난 후에 더욱 선명해진다

지나간 시간이 모두 죄여서

청개구리 울음소리처럼 시끄러운 밤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당신 때문에

내딛는 걸음마다 허방이다

물먹은 바람 하나 버려진 고아처럼 떠돌고

베인 시간을 견디느라 온몸에서 비린내가 난다

폐허다

​​

가을

 

딸아이가 한 남자의 온기를 따라 집을 빠져나가자

남편이 딸아이 방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둘이 쓰던 안방이 온전히 내 차지다

자유다

체온이 다른 두 사람이 한 방에서 한 침대를 쓰며

잠을 설쳤다

여름엔 뜨겁다고 밀어내고 겨울이면 다른 체감온도로

각자의 이불을 펼치며 서걱거렸다

제발 좀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구시렁대는 사이

두 사람의 머리가 희끗해졌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흩어져

널찍한 침대에서 혼자만의 이불을 펼친다

갑갑함도 사라지고 시끄럽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이 순조롭다

꿈속에서 돌아눕다 문득 손 뻗은 자리가 서늘하다

뜨겁던 계절이 빠져나간 빈자리

헐렁해진 이불 속으로 냉기가 파고든다

자유란 서늘한 외로움과 함께 몸을 섞는 일이다

이별

 

철새 보러 간 순천만에는

철새는 없고 갈대숲만 펼쳐져 있다

개펄엔 구멍들이 숭숭하고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고별사처럼 질퍽하다

바람이 낸 길을 따라

한곳으로 쓰러질 듯 굽어 있는 갈대숲

푹푹 마음을 빠뜨리며 걸어온 길

이제 뒤돌아서야 할 때다

다시 봄이 오는 시간 어디쯤에

저 그리움의 방향도 문득 달라져 있으리라

세월

 

낡은 플래카드를 매단 나무 한 그루

몸에는 커다란 못이 박혀 있다

얼마나 긴 시간을 운명처럼 견뎠는지

박힌 못을 삼키고

못이 물고 있는 플래카드를 제 살 깊숙이 심었다

바람에 펄럭이며 쓰라린 시간을 지나

상처와 함께 한 몸이 되어 버린 나무와 못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나에게 박혀 든 당신이라는 못

이제 나를 베지 않고는 너를 빼낼 수가 없다

​​

길들여진다는 것

 

옥상 화분에 봉숭아 모종을 심어 놓고 긴 시간 잊었다

화분에는 잡풀이 날아들어 봉숭아를 덮었다

높게 키를 세운 풀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모습

거친 입김에 시달려온 시간만큼 가늘다

억센 풀을 뽑아내려 하자

봉숭아 여린 줄기가 푹 고꾸라진다

홀로서기는 이미 늦었다

계절이 다할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할 거 같다

운명이나 팔자는 저렇게 만들어진다

​​

목줄

 

홀로 주말농장을 지키던 개가

흙바닥에 엎드린 채 장대비를 맞고 있다

제 집을 두고서도 들어갈 생각조차 않는다

안팎이 모두 감옥인 듯

헐떡거림만으로 넘을 수 없는 벽

울음마저 버린 시선이 머물 곳은 제 자신뿐이다

침몰당한 배처럼 바닥에 엎드려

자신을 노려보느라 반쯤 눈을 감았다

한 번쯤 찌그러진 제 밥그릇을 걷어차고

자신을 내다 버리고 싶은 것이다